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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사람

한국 & 사람

(출처:금산군)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는데 약 1500년 전 강처사의 전설에의하면 금산의 진악산 관음굴에서 어머니의 쾌유를 빌고 있던 강씨성을 가진 선비에게 꿈에서 "암벽에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드려라"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을 찾아나서 그 풀을 약으로 달여드리니 어머님 병이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개안리(현재 남이면 성곡리) 마을에 심어 재배하게 된 것이 금산인삼이라는 것이다. 제나라의 학자 도홍경의 저서 ‘신농본초경’에 금산인삼의 우수성을 적은 기록이 발견돼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다. 충청남도 금산은 예부터 개성지방과 함께 한국의 2대 인삼산지로 알려져 왔다. 금산의 인삼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은 6•25 전쟁 이후로, 1960∼70년대 초까지도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 이상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인삼은 연작이 어렵지만 재배기술의 확대로 그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현재 금산의 인삼 생산량은 전국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인삼 조합들도 대부분 금산에서 가격을 결정받고 있어 여전히 금산은 전국 최대의 인삼 집산지 시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0년대부터 운영되었다는 충남 금산의 전통시장은 약령시장으로 대표된다. 금산 약령시장은 우리나라 3대 약초시장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그 바탕은 인삼이었다. 금산의 중도리 일대에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서는 5일장과 함께 상설시장•수삼센터•백삼시장인 국제시장•약초전문시장 등이 함께 들어서 있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과 농민들, 수삼•백삼•홍삼 등 각지의 인삼들로 북적댄다. 특히 장날 새벽 3∼4시경부터 오후 3∼4시까지가 가장 성황을 이룬다. 현재 값싼 외국산 수입인삼에 맞서 질 좋은 우리의 인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1981년 이후부터는 매년 9월이나 10월에 금산인삼제가 열리기도 한다. (사진:덕담 박승우)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서기 5세기경 중국 양(梁)나라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본초몽전(本草蒙筌)에서이며 한편 명의별록(名醫別錄)과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동양최고의 의서인 신농본초경(A.D.456~536)이고 이시진의 본초강목(A.D.1596)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금산군)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는데 약 1500년 전 강처사의 전설에의하면 금산의 진악산 관음굴에서 어머니의 쾌유를 빌고 있던 강씨성을 가진 선비에게 꿈에서 "암벽에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드려라"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을 찾아나서 그 풀을 약으로 달여드리니 어머님 병이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개안리(현재 남이면 성곡리) 마을에 심어 재배하게 된 것이 금산인삼이라는 것이다. 제나라의 학자 도홍경의 저서 ‘신농본초경’에 금산인삼의 우수성을 적은 기록이 발견돼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다. 충청남도 금산은 예부터 개성지방과 함께 한국의 2대 인삼산지로 알려져 왔다. 금산의 인삼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은 6•25 전쟁 이후로, 1960∼70년대 초까지도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 이상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인삼은 연작이 어렵지만 재배기술의 확대로 그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현재 금산의 인삼 생산량은 전국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인삼 조합들도 대부분 금산에서 가격을 결정받고 있어 여전히 금산은 전국 최대의 인삼 집산지 시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0년대부터 운영되었다는 충남 금산의 전통시장은 약령시장으로 대표된다. 금산 약령시장은 우리나라 3대 약초시장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그 바탕은 인삼이었다. 금산의 중도리 일대에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서는 5일장과 함께 상설시장•수삼센터•백삼시장인 국제시장•약초전문시장 등이 함께 들어서 있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과 농민들, 수삼•백삼•홍삼 등 각지의 인삼들로 북적댄다. 특히 장날 새벽 3∼4시경부터 오후 3∼4시까지가 가장 성황을 이룬다. 현재 값싼 외국산 수입인삼에 맞서 질 좋은 우리의 인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1981년 이후부터는 매년 9월이나 10월에 금산인삼제가 열리기도 한다. (사진:덕담 박승우)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서기 5세기경 중국 양(梁)나라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본초몽전(本草蒙筌)에서이며 한편 명의별록(名醫別錄)과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동양최고의 의서인 신농본초경(A.D.456~536)이고 이시진의 본초강목(A.D.1596)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동진(朴東鎭, 아호(雅號)는 인당(忍堂), 1916년 7월 12일~2003년 7월 8일)옹은 중학 졸업반인열 여섯살때 판소리에 넋을 잃은 후로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집을나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유명하다는 소리선생은 모두 찾아다니며 소리를 익혀나갔다. 그때 만난 스승들이 당대 명창들이던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 정정열씨 등이다. 하지만 소리꾼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기생 소리 선생 노릇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러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며 비로소 소리에만 집중할 수있게 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 늦여름 '흥보가'를 5시간 동안완창한 이후이다. 이를 기점으로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 0’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등 완창 발표회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 등 새로운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렇듯 그가 완창하지 않은 판소리가 거의 없을정도이다. 여든의 말년에 나이에도 믿기지 않는 정력으로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반에 이르는 판소리 완창을 해냈다. 1973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비대중적이라는 '적벽가'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단장에 취임하고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가졌다.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뒤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잇단 종교적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새 장을 열기도했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1987년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90년대후반 공주에 낙향해 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노구에도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81년은관문화훈장, 1982년 전국국악대상, 1983년에는 서울시문화상, 작고 후 2003년 7월 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시진: 덕담 박승우) 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동진(朴東鎭, 아호(雅號)는 인당(忍堂), 1916년 7월 12일~2003년 7월 8일)옹은 중학 졸업반인 열 여섯살때 판소리에 넋을 잃은 후로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유명하다는 소리선생은 모두 찾아다니며 소리를 익혀나갔다. 그때 만난 스승들이 당대 명창들이던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 정정열 씨 등이다. 하지만 소리꾼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기생 소리 선생 노릇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러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며 비로소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 늦여름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완창한 이후이다. 이를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 0’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등 완창 발표회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 등 새로운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렇듯 그가 완창하지 않은 판소리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여든의 말년에 나이에도 믿기지 않는 정력으로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반에 이르는 판소리 완창을 해냈다. 1973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비대중적이라는 '적벽가'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고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뒤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잇단 종교적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새 장을 열기도 했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 공주에 낙향해 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노구에도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81년 은관문화훈장, 1982년 전국국악대상, 1983년에는 서울시 문화상, 작고 후 2003년 7월 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시진: 덕담 박승우)

(사진: 덕담 박승우) 창덕궁 비원(昌德宮秘苑) 비원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면적 약 10만 3천여 평에 이르는 왕실의 연회와 휴식공간이자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조영된 정원유적이다. 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이듬해 정자인 해온정(解瑥亭)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파면서 시작된 비원의 조영은 1921년의 선원전 건립에 이르기까지 계속 새로운 정자를 짓기도 하고 샘을 파는 등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 북원, 금원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비원'이란명칭은 대한제국기에 처음 나타난다. 비원이 가장 화려했던 때는 광해군 시기로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것을복구하면서 수많은 정자를 짓고 기이한 꽃과 괴석으로 장식하였다. 비원은 자연지세에 따라 누각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배치하였으며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차고 맑은샘물로 애련지, 부용지 등 여러 연못을 채웠다. 이 물은계속 흘러 창경궁 춘당지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특히 아름다운 정자는부용정(芙蓉亭)으로 평면이 十자 모양의 겹처마 단층 건물로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보이도록 지어졌다. 또한 건물의 일부를 연못 위로 내밀어 물위에 그림자를비치게 하였으며 정자가 발을 담그고 있는 연못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신선의 공간을 상징화하였다. (사진: 덕담 박승우)   창덕궁 비원(昌德宮 秘苑) 비원은 창덕궁의 후원으로 면적 약 10만 3천여 평에 이르는 왕실의 연회와 휴식공간이자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조영된 정원유적이다.   1405년에 창덕궁이 창건되면서 이듬해 정자인 해온정(解瑥亭)을 짓고 그 앞에 못을 파면서 시작된 비원의 조영은 1921년의 선원전 건립에 이르기까지 계속 새로운 정자를 짓기도 하고 샘을 파는 등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후원, 북원, 금원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비원'이란 명칭은 대한제국기에 처음 나타난다. 비원이 가장 화려했던 때는 광해군 시기로 임진왜란으로 피폐된 것을 복구하면서 수많은 정자를 짓고 기이한 꽃과 괴석으로 장식하였다.   비원은 자연지세에 따라 누각과 정자를 짓고 연못을 배치하였으며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차고 맑은 샘물로 애련지, 부용지 등 여러 연못을 채웠다. 이 물은 계속 흘러 창경궁 춘당지까지 이어지게 하였다.   특히 아름다운 정자는 부용정(芙蓉亭)으로 평면이 十자 모양의 겹처마 단층 건물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보이도록 지어졌다. 또한 건물의 일부를 연못 위로 내밀어 물위에 그림자를 비치게 하였으며 정자가 발을 담그고 있는 연못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신선의 공간을 상징화하였다.

인간이 거주하는 집의형태와 구조는 기후조건과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그것을 짓고 생활하는 이의 사상과 생활습성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는 수혈주거에서 움집의 형태가 확인되며 귀틀집, 초가, 기와집 등 여러 형식이 보이며 양옥이 도입되어 전통주거와 혼합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텔리전트 아파트가 서는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은 목재를 많이 이용하고, 추운 겨울에 대비하여내한성을 고려하며 주변이 산지이므로 자연지세와 어우러지도록 작은 규모가 많으며 층수가 낮은 것이다. 또민족적 특성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는 사상이 스며있어 자연경관을 변혁시키지 않도록 의도하여 자리를 정하고 규모를 정하며 오히려 건축으로 하여금 허한지세를 보하는 역할을 하게도 한다. 또한 세부장식에서 기능과는상관없는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버리고 담백하게 처리하며 균형과 안정감을 추구하였다. 집을 구성하는요소 중 난방을 위한 온돌과 개방적인 공간인 마루는 우리 집의 큰 특징으로 과학성과 기능성을 고려한 조화로운 결합이다. 양반가 솟을대문과 기와집은 양반가의 상징인 것처럼 인식된다. 문은집주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로서 행랑채 등 문간채를 만들고 이 보다 지붕을 높여 대문을 만든 것으로 원래 사인교 등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점차 권세와 부를 가진 양반가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서민의 초가와 달리 견고하며 위생적인 기와는 권위있는 건축의 지붕재이며 토벽에 칠해지는 회는습기를 막아주며 정갈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어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양반의 가옥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구성에 따라 영역이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집안일을 돌보는 아랫것들이 거처하는 행랑채와 집주인인 남자가 거주하며 손님을 맞는 사랑채, 안주인과 아이들 그리고 부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 조상을 모시는공간인 사당채의 구성이 그것이다. 각 영역은 담장으로 둘러져 구획되었으며 문을 통해 다른 공간에 들어설 수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시 중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사당은 담장을 따로이 쌓아 조선시대의 유교이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효사상의 반영으로서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하였다. 정읍 김씨고택 (문현정 사진전) 1784년에 김명관이 10여년에걸쳐 완공한 아흔아홉칸 규모의 상류주택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자리잡은 이 고택은 사랑채, 안채, 안사랑채,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사이사이에 세운 샛담으로 구축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 특색의 구조와 건물의 부드러운 선을잘 살린 호남지방의 대표적 전통가옥이다. 후세에 개조하거나 크게 보수하지 않아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 2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집의 형태와 구조는 기후조건과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그것을 짓고 생활하는 이의 사상과 생활습성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주거문화는 수혈주거에서 움집의 형태가 확인되며 귀틀집, 초가, 기와집 등 여러 형식이 보이며 양옥이 도입되어 전통주거와 혼합되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텔리전트 아파트가 서는 등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의 특징은 목재를 많이 이용하고, 추운 겨울에 대비하여 내한성을 고려하며 주변이 산지이므로 자연지세와 어우러지도록 작은 규모가 많으며 층수가 낮은 것이다. 또 민족적 특성에 따라 자연에 순응하는 사상이 스며있어 자연경관을 변혁시키지 않도록 의도하여 자리를 정하고 규모를 정하며 오히려 건축으로 하여금 허한 지세를 보하는 역할을 하게도 한다.   또한 세부장식에서 기능과는 상관없는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버리고 담백하게 처리하며 균형과 안정감을 추구하였다. 집을 구성하는 요소 중 난방을 위한 온돌과 개방적인 공간인 마루는 우리 집의 큰 특징으로 과학성과 기능성을 고려한 조화로운 결합이다.   양반가 솟을대문과 기와집은 양반가의 상징인 것처럼 인식된다. 문은 집주인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시로서 행랑채 등 문간채를 만들고 이 보다 지붕을 높여 대문을 만든 것으로 원래 사인교 등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점차 권세와 부를 가진 양반가의 상징으로 변한 것이다.   서민의 초가와 달리 견고하며 위생적인 기와는 권위있는 건축의 지붕재이며 토벽에 칠해지는 회는 습기를 막아주며 정갈하게 보이는 장점이 있어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양반의 가옥은 거주하는 사람들의 구성에 따라 영역이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집안일을 돌보는 아랫것들이 거처하는 행랑채와 집주인인 남자가 거주하며 손님을 맞는 사랑채, 안주인과 아이들 그리고 부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 조상을 모시는 공간인 사당채의 구성이 그것이다. 각 영역은 담장으로 둘러져 구획되었으며 문을 통해 다른 공간에 들어설 수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다시 중문을 통해 들어설 수 있으며 사당은 담장을 따로이 쌓아 조선시대의 유교이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효사상의 반영으로서 집안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임을 표시하였다.   정읍 김씨고택 (문현정 사진전) 1784년에 김명관이 10여년에 걸쳐 완공한 아흔아홉칸 규모의 상류주택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자리잡은 이 고택은 사랑채, 안채, 안사랑채, 바깥행랑채, 안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사이사이에 세운 샛담으로 구축하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 특색의 구조와 건물의 부드러운 선을 잘 살린 호남지방의 대표적 전통가옥이다. 후세에 개조하거나 크게 보수하지 않아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 있으며 중요민속자료 제 2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편종 16개의종을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위 아래 각 8개씩 건 형태이다. 편종 16개의크기는 같고, 종의 두께가 얇으면 소리가 낮고, 두께가 두꺼우면그 소리가 높다. 또한 제례에 쓰는 편종은 그림 없이 순검질박하게만들고 조회나 연향에 쓰는 편종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썼다. 틀 중앙에는 구멍을 뚫은 장방형의 방대와 그 위에놓은 구멍 뚫린 목사자 한 쌍에다 꽂아서 고정시키고 이 틀 양편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5개의공작 등 화사한 장식으로 웅대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편경 고정 음률을 가진 돌로 만든 악기이다. 고려 때부터 편종과 함께 사용한 아악기로서 경돌을 깎아 만들며 편종과 크기는 같고 두께에 따라 음이 낮기도하고 높기도 하다. 방대와 틀, 그리고 16개의 경돌을 음률순으로 다는 법은 편종과 같고 목사자 대신 백아(흰기러기), 용두 대신 봉두 등을 쓰는 점이 편종과 다르다. 백아를쓰는 것은 편경 소리가 청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음악에서나 편경은 편종과 함께 편성한다. 징 일정한 음률이 없는 쇠붙이로 만든 타악기로 대취타, 무악, 농악 등에 널리 쓰인다. 주로 매 장단의 첫 박에 많이 치는데 징은 한번 치면 그 진동이 매우 크며 여운이 오래가기 때문에 빠른 박자로 여러 번 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꽹가리 그 소리가 꽹꽹한다고 해서 꽹과리라 부르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매귀라고도 하였다. 종묘 제례악인 정대업에 사용되었고 현재는 농악에주로 사용된다. 농악에 쓰이는 꽹과리에는 상쇠와 부쇠로 구분되고그 소리가 높고 땡땡한 것은 숫꽹과리라 하여 상쇠가 치고 소리가 조금 낮고 부드러운 것은 암꽹과리라 하여 부쇠가 친다. 농악 놀이의 전 과정은 상쇠의 지휘에 따라 진행된다. 박 박은 단단한 박달나무로 된 6조각의 판자쪽의 한 편에 구멍 2개를 뚫어 가죽끈으로 한데 묶고다른 한 편을 쭉 벌렸다가 힘차게 모아 치는 악기이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관현합주, 춤 등에서 광범하게 사용된다. 예전에는 음악의 시작과 끝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매 장단에 한 번씩 쳐서 마루를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음악을 시작할 때는 한 번 치고 음악이 끝날 때는 세 번 침으로써 시작과 끝맺음을 지휘하는법과 궁중정재, 즉 춤을 출 때 춤사위와 방위의 변화를 지휘하는 법만이 남아 있다. 춤의 변화를 지시할 때는 한 장단의 중간 박에서박을 쳐 준다. 장고 나무통에다 가죽을 씌워서 만든 북 종류의 하나로리듬 악기로서 가장 널리 쓰인다. 장고는 오른손에 장, 즉 채를 들고 치는 북이라는 의미이나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腰鼓) 라고도 한다. 왼쪽 가죽은 두꺼워 낮은 음이 나고 오른쪽 가죽은 얇아서높은 음이 난다.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과거에는 물론 현재도 이장고의 구실은 참으로 크다. 관현합주, 가곡, 가사, 시조, 잡가, 민요, 무악, 산조, 농악 등 우리 나라의 각종 음악과 놀이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어떤 악기보다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편종 16개의 종을 두 단으로 된 나무틀에 위 아래 각 8개씩 건 형태이다. 편종 16개의 크기는 같고, 종의 두께가 얇으면 소리가 낮고, 두께가 두꺼우면 그 소리가 높다.  또한 제례에 쓰는 편종은 그림 없이 순검질박하게 만들고 조회나 연향에 쓰는 편종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썼다.    틀 중앙에는 구멍을 뚫은 장방형의 방대와 그 위에 놓은 구멍 뚫린 목사자 한 쌍에다 꽂아서 고정시키고 이 틀 양편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5개의 공작 등 화사한 장식으로 웅대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편경   고정 음률을 가진 돌로 만든 악기이다. 고려 때부터 편종과 함께 사용한 아악기로서 경돌을 깎아 만들며 편종과 크기는 같고 두께에 따라 음이 낮기도 하고 높기도 하다.   방대와 틀, 그리고 16개의 경돌을 음률순으로 다는 법은 편종과 같고 목사자 대신 백아(흰 기러기), 용두 대신 봉두 등을 쓰는 점이 편종과 다르다. 백아를 쓰는 것은 편경 소리가 청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음악에서나 편경은 편종과 함께 편성한다.       징    일정한 음률이 없는 쇠붙이로 만든 타악기로 대취타, 무악, 농악 등에 널리 쓰인다.    주로 매 장단의 첫 박에 많이 치는데 징은 한 번 치면 그 진동이 매우 크며 여운이 오래가기 때문에 빠른 박자로 여러 번 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꽹가리  그 소리가 꽹꽹한다고 해서 꽹과리라 부르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매귀라고도 하였다.  종묘 제례악인 정대업에 사용되었고 현재는 농악에 주로 사용된다.    농악에 쓰이는 꽹과리에는 상쇠와 부쇠로 구분되고 그 소리가 높고 땡땡한 것은 숫꽹과리라 하여 상쇠가 치고 소리가 조금 낮고 부드러운 것은 암꽹과리라 하여 부쇠가 친다.    농악 놀이의 전 과정은 상쇠의 지휘에 따라 진행된다.        박    박은 단단한 박달나무로 된 6조각의 판자쪽의 한 편에 구멍 2개를 뚫어 가죽끈으로 한데 묶고 다른 한 편을 쭉 벌렸다가 힘차게 모아 치는 악기이다. 삼국시대부터 사용해 왔으며 관현합주, 춤 등에서 광범하게 사용된다.    예전에는 음악의 시작과 끝을 지휘할 뿐만 아니라 매 장단에 한 번씩 쳐서 마루를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현재는 음악을 시작할 때는 한 번 치고 음악이 끝날 때는 세 번 침으로써 시작과 끝맺음을 지휘하는 법과 궁중정재, 즉 춤을 출 때 춤사위와 방위의 변화를 지휘하는 법만이 남아 있다.   춤의 변화를 지시할 때는 한 장단의 중간 박에서 박을 쳐 준다.     장고  나무통에다 가죽을 씌워서 만든 북 종류의 하나로 리듬 악기로서 가장 널리 쓰인다.    장고는 오른손에 장, 즉 채를 들고 치는 북이라는 의미이나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細腰鼓)  라고도 한다. 왼쪽 가죽은 두꺼워 낮은 음이 나고 오른쪽 가죽은 얇아서 높은 음이 난다.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과거에는 물론 현재도 이 장고의 구실은 참으로 크다. 관현합주, 가곡,  가사, 시조, 잡가, 민요, 무악, 산조, 농악 등 우리 나라의 각종 음악과 놀이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어떤 악기보다도 널리 보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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