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淸溪川)의 열두 다리

기사입력 2023.01.30 09:06 조회수 3,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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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하기 전 청계천(淸溪川)에는 열두 개의 다리가 있었다. 대광통교, 소광통교, 수표교, 장통교, 효경교, 태평교(마전교), 모전교, 송기교, 혜정교, 철물교, 동대문 안의 첫 다리(初橋), 두 다리(二橋) 등이다.청계천의 다리.jpg

태종은 1411년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했는데 하천 이름을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의 개천(開川)'이라고 명명했다. 청계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1914년 '창지개명(創地改名)'의 일환으로 우리 지명을 강제로 바꿀 때 붙여진 이름이다.송지교.jpg

청계천의 첫 다리, 송기교(松杞橋)는 지금의 세종로 4거리에서 신문로 방향 쪽에 있었던 다리다. 자료에 따르면 청계천을 3개의 구간으로 나누어 군문(군대)에서 관리했던 기록이 있는데 송기교-장통교, 장통교-마전교, 마전교-영도교 구간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이 각각 맡아서 관리했다. 송기교의 이름은 주변에 가죽을 팔던 상점들인 송기전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모전교는 조선 태종 때 돌다리로 개축됐다. 당시 이름은 '신화방동입구교'였다. 신화방은 조선 초기 서부 8방 중의 하나다. 영조 때 모전교로 바뀌었는데 주변에 과일가게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청계천의 다리 1.jpg

광통교(廣通橋)는 모전교를 지나 하천을 따라 걷다 보면 있는데 광통방(廣通坊)에 있다고 하여 광통교로 불리었다. 광통교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광교가 있는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원래 토교인 광통교를 석교로 개축할 때 태종은 그의 계모인 신덕왕후의 왕릉(정릉)에서 병풍석을 가져와 건축재로 활용했다고 한다.


장통교(長通橋)는 남산 등에서 발원된 여러 갈래의 물길이 합류한 후 청계천으로 유입되는 지점에 설치되었는데 장통방(長通坊)에 있어서 장통교라고 불렀다. 장통교 전후로 물길을 따라가면 왼편에 '수선전도'와 '정조대왕 능행반차도'가 있다. 수선전도는 한양의 옛 지도를 말한다. 정조대왕 능행반차도는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왕릉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의전 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수표교(水標橋)는 1950년대 말 청계천 복개 공사 시 유일하게 남아있는 다리인데 현재 장충당공원으로 옮겨졌다. 수표교 주변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최초로 서울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한 지역이다.청계천의 다리 2.jpg

마전교(馬廛橋) 밑을 흐르는 청계천의 맑은 물 수표교는 초기에 근처에 우마를 매매하던 시장이 있어 마전교라고 불렸다. 마전교는 태종 때 창선방에 있다고 해서 '창선방교'라 했고 성종 때까지'태평교'로 불리다 영조 때 다리 주변에서 말을 매매했던 곳이라 해서 마전교가 됐다.

효경교(孝經橋)는 종로대로의 이현(梨峴)에서 남쪽 낙선방(樂善坊)으로 가는 길이 지나는 청계천 위에 설치되었던 다리이다. 부근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 하여 '맹교(盲橋)', '소경다리'라고도 불렀다. 현재 세운상가 옆 아세아 전자상가 동편에 있었다.


혜정교(惠政橋)는 북악산(北岳山) 아래 삼청동(三淸洞)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경복궁 오른쪽 궁장(宮墻) 외부를 따라 동십자각(東十字閣)을 지나 종로까지 도달한 부근에 세워진 다리이다. ‘혜정(惠政)’은 ‘왕이 은혜로운 정치를 베푼다’는 의미로 영조때 기우제 이후 비가 내리면 종묘에 행행하여 보사제(報祀祭)를 지냈다. 경복궁을 나와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를 지나 동대문 방향으로 지나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혜정교 인근은 종로 번화가인 동서대로였다.


철물교(鐵物橋)는 관자동(貫子洞)의 '관'자와  관철동(貫鐵洞)의 '철'자에서 따온 이름으로 관자동은 금, 옥, 뿔, 뼈로 망건 당줄을 꿰는 고리인 관자를 파는 전이 있어 관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관자동이라 하였다 . 철물교는 종로 2가 동남쪽에 있던 다리로 계동, 재동 방면의 물이 관훈동, 인사동을 거쳐 남쪽으로 흘러서 장통교(長通橋) 아래로 흘러 들어가는 중간으로 지금의 종로 2가를 건너는 다리인데 통운교(通雲橋 )라고도 했다 . 주변에 철물전이 많았기 때문에 철물전교 또는 철물교 , 줄여서 철교라고도 하였다.


초교(初橋)는 지금의 종로5가 2번지와 종로6가 252번지 사이에 있던 다리로 대학천, 흥덕동천은 초교라는 옛 다리가 있었던 종로를 만나 동대문에서 성내로 들어올 때  첫째 다리가 되므로 첫다리 혹은 초교, 동교(東橋)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교(二橋)는 종로5가 78번지와 효제동 331번지 사이로 지금의 종로5가역 부근으로 두다리, 재교(再橋),연지동교(蓮池洞橋) 연못골다리 등으로 불렸다. 흥인지문을 통해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흥덕동천의 초교에 이어 두 번째로 밟는 다리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청계천 다리에서는 '다리밟기'가 광통교, 수표교 등에서 성행했는데 특히 정월 대보름날 밤이 되면 도성 안 남녀 모든 사람들이 저녁 종소리를 들으려고 먼저 종루(鐘樓)로 몰려 종소리를 들은 다음 청계천을 비롯한 도성 곳곳에 있는 다리로 흩어져 열두 다리를 차례로 밟았다. 정월 대보름날 다리밟기를 하는 것은 '교(橋)'가 우리 나라 말로는 '다리(脚)'로 발음되므로 이렇게 하면 1년 동안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속설이 있었는데 열두 다리가 1년을 상징해 다리밟기 놀이를 했다고 한다.

송파다리밟기.jpg

다리밟기는 남녀노소,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즐겼던 명절놀이였던 만큼 정월 대보름날이면 다리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상류층 사람들은 서민들이 붐비는 15일 밤을 피하여 그 전 날인 14일 밤에 다리밟기를 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양반답교’라고 하였다. 또 부녀자들은 14·15일을 피하여 16일 밤에 행하였다. 결국 다리밟기는 정월 대보름 하루 동안의 행사가 아니라 3일 동안 계속될 정도로 크게 성행했다.


다리밟기는 1940년대 서울지방의 경우, 보름날 남자만이 다리밟기를 했으며 열두 다리만 건너는 것이 아니라 도성 안에 있는 모든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후 서울에 있었던 하천과 다리가 하나 둘 사라지면서 다리밟기도 점차 사라졌고 현재는 '송파 답교놀이'만 남아 민속놀이로 계속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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