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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옥으로 유명한 계동(桂洞)
현대사옥으로 유명한 계동(桂洞)
계동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동명. 동쪽으로는 원서동(苑西洞), 서쪽으로는 가회동(嘉會洞)·재동(齋洞), 북쪽으로는 삼청동(三淸洞), 남쪽으로는 운니동(雲泥洞)과 접해 있다. 계동 동명은 원래 이곳에 조선시대 의료기관이던 제생원(濟生院, 조선 초기 서민들의 질병치료를 관장하였던 의료기관. 원래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광혜원이었으나 문을 연 지 13일 만에 대중을 구제한다는 뜻으로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이 있어서 제생원(濟生洞)이라 하던 것이 음이 변하여 계생동(桂生洞)이라 불리다가 1914년 동명 제정 때 계생동의 발음이 기생원(妓生洞)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생’자를 생략하여 계동으로 줄인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계동은 조선 중기까지 한성부 북부 양덕방에 속하였고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는 한성부 북부 양덕방계로 되어 있었다. 고종 4년(1867)에 간행된 '육전조례'에는 양덕방 계생동계로 바뀌었으며 1895년 윤5월 1일 칙령 제98호로 한성부 북서(北署) 양덕방 계생동계에 계동이 신설되었다.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한성부 북서에서 경성부 북부로 바뀌었고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 3호에 의해 개편된 북부 양덕방의 계동 지역이 1914년 4월 1일 경기도고시 제 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계동으로 칭하였다. 같은 해 9월 27일 경성부조례 제 8호로 북부출장소의 관할에 속하고 이듬해 6월 1일에는 북부출장소의 폐지로 경성부 직할이 되었다.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관할구역이 확장되고 경기도고시 제 32호로 동 명칭이 개정될 때 경성부 걔동정(桂洞町)이 되고 1943년 6월 10일 조선총독부령 제1 63호에 의한 구제도(區制度) 실시로 종로구가 신설되면서 경성부 종로구 계동정이 되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 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계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십수 년전 사둔 책을 만났습니다
십수 년전 사둔 책을 만났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 때 그 사람이 그 사람 맞나 하는 의심을 가집니다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에 치장돼 있거나 심하게 일그러진 채 묘사되기 때문이지유 이런 식견이 생긴 건 요 정도 살다보니 언어에서 맛과 결 그리고 감각까지 저절로 터득하게 된 때문이지요 ... ... 십수 년전 사둔 책을 만났습니다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명산대찰 名山大刹에 관한 흔하디 흔한 책이 아니라 '그저 절터' 이야기입니다 또한 휘황찬란한 불상 이야기도 아닙니다 절터... 절터를 폐사지 廢寺址란 말로 표현하는 게 싫습니다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간 곳을 폐사지라니요 이 곳에서 만난 치장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맑은 언어들을 인용합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와 달리 제가 변용한 부분도 있습니다 ●계곡물은 흘러 자신보다 낮은 강으로 가고 강물은 또 자신보다 더 낮은 바다로 흘러 강보다 더 넓고 깊으며 낮은 바다가 된다 낮은 곳으로 내려올수록 물은 깊어지고 넓어진다 ...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풍경이 다스리고 풍경이 다스려 아문 상처를 또다른 사람들이 매만져 준다 ... 은산절벽銀山絶壁은 바로 자신에게 있다 세상에 자신이 스스로에게 쌓은 벽만큼 높은 벽이 또 있을까 ...빛은 그림자를 만들고 그를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그늘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 하지만 사진은 빛과 그늘과 그림자의 예술이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주연일 뿐 어느 하나 조연은 없다 자연은 모래알이든 집채보다 큰 바위이든, 한 포기 풀이든 천 년 묵은 고목이든 그 가치는 모두에게 빛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나의 발자국을 따라 눈길을 걸어온 이가 나에게 배불리 음식을 나눠주고, 앞서서 이 길을 걸어간 사람을 좇아온 나에게 이미 사라지고 없는 선사禪師는 넘치도록 아름다운 삶을 일러주었다 ○●소박素樸 소素는 아무 것도 물들지 않은 흰빛을 이야기하고, 박樸은 사람 손을 타지 않은 통나무를 말하는 것이니 노자가 이야기한 소박은 꾸밈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 아예 꾸밈이 더해지지 않은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일컫는다 ... 눈앞을 가파르게 막아선 산에서 하염없는 눈꽃송이 피었다간 후드득 떨어지고 이내 다른 나무에서 다시 핀다 그렇게 헌화공양獻花供養을 받으며 더없이 엄숙하게 빛난다 나는 겨울이 되면 늘 그 절터가 그리웠다 그 절에 머물렀던 그 많은 운수 납자들 또한 물끄러미 그 꽃을 바라보며 선정에 들었으리라 ...선비들의 두문杜門은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거는 것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말을 하지 않을 뿐 글을 버리지 않으니 생각과 말을 포기한 것이 아닌 세상의 의견에 반反한 침묵이라 할 수 있겠으며 뜻이 같은 사람에게는 침묵하지 않는다 그러나 묵조의 침묵은 스스로를 향한 침묵이다 그저 스스로를 바라볼 뿐 자신에게나 누구에게도 입을 닫는 것이다 ...말을 잊은 곳에 남는 것이 풍경이런가 눈을 감은 곳에 떠오른 것이 풍경이런가 ...부처님에게로 가는 사람, 누군들 삶의 상처 없는 이가 있겠으며, 또 그에게로 가서 그 상처마저 아름답게 아물지 않는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버릇처럼 시대를 가늠하지 말고 양식을 따지지 말며 미루어 헤아리며 어루만져 보라 곳곳에 남아 있는 석조 유물을 보며 우리가 감탄해야 할 것은 그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그것을 새기던 사람들의 진정한 마음이다 ... 아름다움과 추함은 언제나 함께 있으니 어느 하나로 인하여 다른 하나가 잠시 돋보인다 ... 오만한 미술사의 접근 방식으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아니라고 해서 허튼 눈짓으로 지나치지 말라 국보나 보물 앞에서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도 모르는 채 난감해본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절터에서의 미술사적 눈길은 비록 형체조차 문드려져 알아볼 수 없거나 깨져서 초라한 주춧돌에게까지 소홀해서는 안 된다 ... 절터에서 때론 지식이나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도 부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선사들의 말씀 몇 마디나 경전 몇 줄보다 절터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의 감동은 자신의 속 깊은 느낌으로 남아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절터는 모든 곳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정갈한 화병에 꽂힌 꽃이 금당에 놓이는 대신 논틀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가 헌화공양을 하고 법당이 있었을 곳에 제 마음껏 피어난 노란 들국화가 짙은 향기로 향 공양을 올리는 곳, 부처님이 앉으셨던 자리에는 새들이 머물다 떠나가고 사리 모신 탑에는 바람이 태어나고 사라진다 (계 속)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탑이 있는 대로 가는데 그니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리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절터 순례는 굳이 학술적이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가 더욱 소중한 것이다 ... 스스로 나를 움직이지 않으면 가 닿을 수 없는 곳, 고통을 이겨 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바로 멀고도 먼 내 자신 ... 보적선사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오라 하자 한 제자가 물구나무를 섰다고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닫힌 내 마음을 열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바람은 여린 풀이나 단단한 바위 그리고 강물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만져준다 ... 새벽같이 찾아들 국밥집엔 할머니가 있다 정갈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고 밥을 먹고 있는 상머리에 낯선 이가 불쑥 앉아 새벽부터 소주잔을 권하는 곳 그래도 그 집을 찾는 까닭은 주인 할머니 때문이다 그니는 말 그대로 할머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경전 이야기 이지누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과 함께 하다보면 무겁고 복잡한 생각들이 맑은 공기처럼 가벼워집니다 누가 말하기를 불교는 자비의 종교가 아니라 이해의 종교라고 했다는데 여기서 이해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한다는 뜻이겠지요 ... ... 한결 더 가벼워지고 싶은 날엔 여기 인용한 마음 구절 몇 개 들고 절이 없는 절 여행 그 곳에서 나를 이해하는 그 유익한 시간 한 자락 살포시 펼쳐보는 게 어떨까유 히이~♡
내 버킷리스트, 초록섬 가파도 하룻밤 캠핑
내 버킷리스트, 초록섬 가파도 하룻밤 캠핑
그렇다.특히 4월과 5월 가파도는 인산인해.20여분 간격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커다란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봄.가파도의 인기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난늘 얘기했지.가파도는 밀물과 썰물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몰려 들어가고 나오고를 하지 말고하루쯤은 머물기를 추천했단.. 우리는 오래 전부터 캠핑으로 다녀오자며 약속을 했고오후 2시에 운진항에 모여 승선명부 작성과 확약서를 내가 대표로 쓰고...예정은 2시30분 배로 들어가려 했지만 우리도 예외가 아닌 3시50분 배를 기다려야만 했지기다림도 좋았던 일행들과 시원한 목축임 맥주로 낮술을 마시게 되었단... ㅎㅎㅎ 올 3월에 개장한 태봉왓 캠핑장이 궁금해서 사전에 예약을 하고 들어갔다.가파도는 수십 번을 갔고 또 여러 번 캠핑과 민박집에서 지냈기에 웬만한 곳은 다 안다는... (태봉왓 캠핑장) 내가 늘 애용하던 박지도 있었지만 이번엔 태봉왓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전체를 빙 둘러보고 각자의 텐트를 피칭해 놓고 걷기로 했다. 지난 번보다 더 색감이 달라지고 있는 보리밭은 바람결에 보리내음이 코끝에 전해지더라. 그대라는 꽃~♡그래 오늘 함께 할 우리 모두가 꽃이길.. 가파도는 지금 황금들판으로 변신 중. 앞서거니뒤서거니우린 여유부리기를 했고 늦은 시간까지 관광객들이 많은 건 노을투어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했기 때문. 감탄 또 감탄 내 아지트도 아우들에게 보여주고 잠시 앉아서 커피 타임을 가졌다. 어여 캠핑으로 돌아가자 추워지니깐 마라도가 보이는 뷰가 좋은 태봉왓 캠핑장이다.유채꽃이 졌지만 그래도 좋더란.유채 냄새가 은은하게 나서 더더욱. 각자의 텐트에 서게해 인생샷~~ 찍어주공 ㅋㅋㅋ 이제부터 즐거운 먹방 타임~ㅎㅎㅎㅎ 유채꽃과 꽃 닮은 우리의 캠퍼들~♡도란도란 얘기꽃이 핀다 어둠과 함께 텐풍도 찍고동영상으로도 담아보면서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어도 춥지가 않아 좋았지그리고 꿈나라로... 일출시간에 맞춰 기상했고.먼저 마라도 방향을 담아보며. 와우... 괜찮을거 같군 점점 붉게 물들던 하늘빛 구름이 열일했던 일출 감사한 하루가 두둥~♡ 모델놀이도 즐겁던 시간 다시 돌아온 유채꽃밭속 캠장으로 돌아오니 나머지 아우들도 일어났더란. 아침으로 떡국을 끓여 먹고모닝 커피도 마신 후 이젠 철수하자. 파도가 거칠던 길따라 포구까지 걷는 동안 자꾸만 멈추게 되던 발걸음.너무 예뻤던 해안과 모슬봉,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 군산! 고근산까지 한 눈에 들어오던 제일 멋졌던 구간.다음엔 저 너머다~~~ 정말 정말좋았던 가파도 캠핑언제 어느 때 가도 좋더라~~~!!!5월초 황금들판일 때 다시 가볼까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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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옥으로 유명한 계동(桂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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