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작곡자, 한국 서양음악의 개척자 안익태

기사입력 2022.03.02 08:32 조회수 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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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jpg

안익태(1906년 12월 5일 ~ 1965년 9월 16일)

안익태는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의 작곡자이며 한국 서양음악의 개척자이다.

 

1906년 평양에서 출생하여 6세 때부터 교회예배당의 찬송가 소리에 끌려 음악을 배웠다. 1918년 평양숭실중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던 중 3.1운동에 가담하여 학교를 퇴학당했지만 교장의 배려로 1921년 동경으로 유학하였다. 동경국립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며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았고 국내에 돌아와 연주활동을 하며 서양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평양에서 이상재, 조만식 등을 알면서 애국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2년 미국 신시내티 음악학교로 유학하는 한편 신시내티 교향악단 첼로주자로 입단하여 미국에서 몇 차례의 독주회를 가졌다. 그 뒤 1934년에는 유럽으로 가서 지휘 및 작곡을 수업하였고, 1936년에 전통 아악에서 악상을 떠올려 지금의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2차대전 발발 이후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지휘자로 활약하며 로열필, 빈필, 베를린필 등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을 잇따라 지휘했다. 특히 애국가를 주제로 한 '한국환상곡', 교향곡 '파스토랄', 교향시 '강천성악', '논개' 등을 작곡하며 유럽 음악계에 이름을 떨친다.베토벤의 교향곡들과 슈트라우스의 곡들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 스케일이 크고 방대한 음향을 이끌어내는 그의 지휘 능력은 유럽 음악계에서 확고한 음악적 위상을 만든 기반이었다.

 

그는 1959년에 귀국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1965년 7월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후 건강 상태가 악화돼 그 해 9월 16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안익태1.jpg

2008년에 친일처벌위원회의 친일파 명단에 친일 음악가 부문에 선정되어 논란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초반에는 독립운동가로 열심히 활동했지만 중반부터는 당시 일본과 친밀감이 있던 독일로 넘어가 만주국 건국10주년 기념 음악을 만들고 음악회를 지휘했다. 1941년에는 일본의 궁중음악인 에텐라쿠를 지휘하고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하였다.

 

Aan Eaktay was the composer of the Korean national anthem and a pioneer of Western music in Korea. Aan was born in Pyongyang, and studied music i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Furthermore, he studied conducting technique and composition in Europe. He composed the Korean national anthem in 1936 with inspiration from a-ak, Korean traditional music.

 

After the start of the Second World War, Aan resided in Europe and conducted several world-famous orchestras including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the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and the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Aan composed 'Korean Fantasy,' which was based on the Korean national anthem.

 

He also composed 'Pastoral Symphony,' a symphonic poem 'Kangchunsung-ak,' 'Nonke,' and other music and was highly acclaimed in Europe. His interpretation of symphonies by Beethoven and pieces by Strauss, as well as his talent in conducting, provided the basis for his position in the world of music in Europe. He returned to Korea in 1959 and continued to be active as a musician, until his death on Majorca, Spain, in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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