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의 시조, 플럭서스의 유일한 동양인 백남준(白南準)

기사입력 2021.08.21 08:57 조회수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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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jpg
플럭서스 창시자 가운데 유일한 동양인 인 백남준(白南準, 1932년 7월 20일 ~ 2006년 1월 29일)은 플럭서스의 창시자로서보다는 비디오 아트의 시조,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플럭서스(Fluxus)는 1960년대에 형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집단으로 플럭서스라는 이름은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 플럭스(flux)에서 유래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 출생, 1945년 경기 중학교에 입학하였고 신재덕에게 피아노, 이건우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1949년 홍콩으로 건너가 로이덴 스쿨(Royden School)에 입학하였으나 1951년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된다. 동경 대학에서 미학, 미술사, 음악사를 전공, 쉔버그를 주제로 학위를 받고 동대학을 졸업한다. 195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뮨헨의 음악학교(University of Music & Conservatory)에서 음악사를 공부하다가 1958년 다름슈타트 신음악 하기 강좌에 참석, 운명적으로 존 케이지를 만난다.
 
1961년 조지 마키나우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비스바덴에서 플럭서스 창립 공연을 추진한다. 1963년 부퍼탈의 파르나스(Parnass) 화랑에서 미술 사상 최초의 비디오 전시가 되는 역사전인 개인전을 연다.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래, 1965년 샤로트 무어맨과 함께 콤비가 되어 구미 각 지역을 순회하며 해프닝 활동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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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0년대부터는 전위예술보다 비디오 작업에 주력하여 비디오 작가로 자리를 굳혀간다. 1977년 플럭서스 동료이자 비디오 작가인 시게코 구보다와 결혼. 1978년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대학 교수로 초빙.
 
1982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재 회고전을 계기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로 각광받게 되었다. 1984년 위성중계공연 ‘굿 모닝 미스터 오웰’, 1986년의 ‘바이 바이 키플링’ 1988넌의 ‘손에 손잡고’로 위성예술 삼부작 완료.
 
1992년 자신의 환갑을 맞아 잠시 귀국,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 환갑 기념 대 회고전을 가졌다. 현재 뉴욕의 멀서가에 살면서 일년의 1/3은 독일 등 유럽에서 기거하며 작업.
 
1995년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태동의 산파 역할을 하며 한국 미술이 국제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수행했다. 백남준이 직접 관여한 ‘INFO Art’전 주목. 또한 백남준은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전시관 부문에 한국관을 설치하는 일에도 결정적인 역할. 같은 해 그의 예술적 정수가 담긴 ‘일렉트로닉 수퍼 하이웨이’ 전시를 진행.
 
1996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6개월 만에 재기했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세계’ 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으며 이때 레이저 아트 ‘야곱의 사다리’, ‘삼원소’ 등을 전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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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2001)’ 백남준아트센터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되었다.
 
백남준은 예술을 통해 전 인류와 깊은 소통을 추구한 과학자로, 철학자로, 미래학자로, 융합형 아티스트로 여전히 우리 곁에 같이 존재하고 있다.
 
<백남준 소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출신.
 
종로구 창신동 197번지 소위 "큰대문집"에서 18세까지 살았다.
수송국민학교와 경기 제1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피아니스트 신재덕에게 피아노 연주를, 이건우에게 작곡을 각각 배웠다. 이때 한국이 낳은 작곡가 김순남을 사사.
 
1949년 홍콩 로이덴 스쿨로 전학,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
1952년 도쿄 대학교 문과부에 입학. 2년 후 미술사학과 미학을 전공했지만 실제로는 일본 당대의 작곡가 모로이 사부로, 미학자 노무라 요시오 등에게서 작곡과, 음악사학 공부. 졸업 논문은 ‘아르놀트 쇤베르크 연구’.
 
1956년 졸업 후 독일 유학. 뮌헨대학과 쾰른대학 등에서 서양의 건축, 음악사, 철학 등 공부.
뮌헨대학 입학 1년 후에는 프라이부르크 국립 음악 대학교로 옮겨 볼프강 포르트너 교수에게 배우지만 곧 쇤베르크 이후 현대음악의 실험이 활발히 진행되던 다름슈타트 하기 강좌에 참여. 1958년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를 만나 그의 음악에 대한 파괴적 접근과 자유정신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얻었다. 이 영감은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꿔라" 라는 것으로 규정된다.
 
1950년대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액션뮤직의 현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활약.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음악적 콜라주와 함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단숨에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가 착용한 넥타이를 잘라버리는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심플 머리를 위한 선율을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조지 마키우나스, 요셉 보이스 등과 의기투합하여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 전개. 1961년 백남준은 작곡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 이때 1950년대부터 노버트 위너에 의해 제안된 '사이버네틱스' 개념 하에서 전자공학을 공부. 특히 레이다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2년여 동안 홀로 TV를 활용한 미디어 아트로서의 가능성을 탐문하고 실험.. 그 결과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적인 TV를 통해 훗날 비디오 아트라고 불리게 되는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로봇 K-456'을 제작했으며 곧 세계 예술의 중심지 뉴욕으로 이주. 뉴욕 언더그라운드 필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시네마테크 필름메이커스에 관여했으며 스스로 영상 작업을 진행.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뉴욕의 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획기적인 진전. 이후에도 미디어 아트가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서서히 득세해가는 시대적 조류 속에서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예술활동을 전개.
 
1974년부터 백남준은 영상으로서의 비디오 아트를 새로운 미술적 방법인 설치 미술로 변환하여 다양하게 진행, 그에 따라 ‘TV 붓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TV 정원’, ‘TV 물고기’ 등등 많은 대표작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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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부처’ (1974) 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은 불상이 TV를 보고 있는 ‘TV 부처’라는 제목의 작품을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었는데 백남준아트센터의 ‘TV 부처’는 부처가 폐쇄회로 카메라에 실시간으로 찍힌 자신의 모습을 TV 화면 속에서 보고 있는 설치 작품이다.

종교적인 구도자이자 동양적 지혜의 상징인 부처가 현대문명의 상징이자 대중매체인 TV를 본다는 점, 혹은 화면 속 자신에 빠져든 나르시스적인 태도로 인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화면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찰한다는 진지한 주제를 던지기도 한다.

1974년 쾰른 미술관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에서는 백남준이 직접 법의를 걸치고 TV 앞에 앉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관객이 부처가 바라보는 TV 화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을 때 화면 속에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TV 부처’는 백남준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관객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닫혀 있지 않은 전자 환경’을 만드는 작품이다.(백남준아트센터)
 

 

1974년 뉴욕 에버슨 미술관 개인전과 함께 비데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이라는 예술과 기술을 교차시키는 하이브리드에 관한 저작을 내놓아 미디아 아트의 이해를 도왔으며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된 ‘백남준 회고전’을 통해 그의 예술 세계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뉴욕 WNET 방송국, 보스턴 WGBH 방송국과 협력하여 자신의 비디오 아트를 공중파 TV에서 방송.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뉴욕 WNET 방송국과 파리 퐁피두 센터를 연결한 실시간 위성 생중계로 방송하여 전 세계적 반향. 샌프란시스코와 서울까지 연결된 이 국제적인 규모의 위성 아트에는 로리 앤더슨, 피터 가브리엘, 오잉고 보잉고,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앨런 긴즈버그, 이브 몽탕 등의 예술가과 대중문화의 스타가 다수 참여, 전 세계 2천 5백 만명(재방송 포함)이 시청. 이후 ‘위성 아트’ 3부작으로 명명된 ‘바이 바이 키플링’(1986), ‘손에 손잡고’(1988) 등이 이어져 위성 연결을 통한 전세계의 네트워크가 어떻게 새로운 부족사회를 낳는지 실감시켰다.
 
1984년 일본 도쿄 소게쓰[草月]홀에서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가 공동으로 참여한 퍼포먼스 '코요테 콘서트 II'가 펼쳐졌으며 이들이 각각 몽골의 늑대 울음소리와 초원의 달빛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것을 통해 1961년 첫 만남부터 계속 이어온 공동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후 퍼포먼스 계획은 요셉 보이스의 죽음과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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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전시는 독일 쿤스트 할레와 스위스 쮜리히에서 진행된 전시의 서울 투어전시로서 당시 과천 막계동에 자리잡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총 관람 인원 20만 명이 찾은 첫 번째 전시로 기록되었다. 이 전시의 주요한 작품은 '나의 파우스트' 시리즈. 1993년 백남준은 독일 작가 한스 하케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대되어 국가전시관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문명의 동서남북'이라는 주제의 이 전시에서 그는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 문화를 배경으로 전자적 소통을 시도하는 비디오 로봇 형태의‘칭기스칸의 복권’, ‘마르크폴로’, ‘훈족의 왕 아틸라’,‘스키타이의 왕 단군’, ‘로봇 전사’, ‘고대기마인물상’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1996년 4월 9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6개월 만에 재기했으나 10년 후 2006년 1월 29일, 미국 마이애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75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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