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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남의 문화잡기 주요 뉴스
일제의 잔재, 욱천(旭川)고가차로
욱천고가차도는 서울 지하철 1호선 남영역과 용산역 사이 철길 북서편에 위치하고 있다.욱천(旭川)이란 이름이 어색하다. 맞다.旭川의 욱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旭日昇天(욱일승천)의 旭인 것이다.일본 곳곳에 있는 지역명인 '욱천(旭川)'이 사용된 예로, 글자 '욱'은 일본 전범기인 욱일기의 '욱(旭)'자와도 같은 한자이다.과거 서울시가 '욱천'을 조선시대 원래 지명인 '만초천'으로 한 번 바로잡았지만 고가차도에는 여전히 '욱천'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엿 먹어라!는 말이 욕이 된 이유
학부모들은 무로 엿을 만들어 입시와 관련된 기관에 찾아가 엿을 들이대며 '무즙으로 만든 엿을 먹어보라'고 소리 치면서. "엿 먹어라! 이게 무로 쑨 엿이다! 빨리 나와 엿 먹어라! 엿먹어! 무즙으로 쑨 엿 맛이 얼마나 맛있고 달콤한지 정부는 아느냐! 엿 멋어라! 엿 먹어라!" 그리하여~ 결국 김규원 당시 서울시 교육감, 한상봉 문교부차관 등이 사표를 내고 6개월이 지나 무즙을 답으로 써서 떨어질 학생 38명을 정원 관계없이 경기중학 등에 입학시켰다 합니다. 그 후 ... "엿 먹어라"가 욕이 되었다고 합니다.
복숭아 桃. 닥나무楮 후암동 도닥다리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가족이 비를 맞으며 내려가는 계단 장면이 바로 도닥다리에서 촬영했다. 조선시대 이 지역이 복숭아 나무, 닥나무가 다량으로 서식하고 있는 동네었다. 도저동(桃楮洞) 복숭아 桃. 닥나무楮 도저다리가 아닌 도닥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종교 교회 (琮橋敎會), 종침교(琮琛橋)
종교 교회는 좌옹 윤치호의 요청과 도움으로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최초의 미국 남감리회 첫 여선교사 캠벨(J. P. Campbell) 부인에 의해 설립된 교회이다. 1898년 8월 배화학당을 설립한 이도 캠벨이다. 교회 이름이 일반적인 宗敎 종교 가 아닌 조선시대 교회 앞 다리 종침교에서 따온 한자 표기는 종교(宗橋)로 하였다. 창조의 "宗" 이 되는 그리스도 와 교회의 '宗'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를 섬기며 성령이 하나가 되는 능력에 의하여 하늘.땅.동.서로 이어지는 다리 '橋'가 된다는 의미를 두고있다.
청계천 헌 책방가, 대학천 상가
종로 6가와 청계천6가 두개의 골목길 사이에 숨어있는 대학천 상가. 대학천 상가가 조성된 것은 1960년대 경. 한창 번창했을 때는 우리나라 도서 문화보급에 한 축이었다. 대학천이라는 이름이 붙혀진 건 옛 서울대 앞을 흐르던 대학천이 이곳에서 청계천과 합쳐졌기 때문이다. 과거 복개하기 전에 북악에서 시작된 실개천이 성균관 앞을 지나 대학로를 거쳐 청계천과 합류했다.
용산기지 둘레길 산책, 8개 코스를 걷다
용산기지 13km 담길을 따라 총 8개 코스(녹사평 산책길, 한강로 산책길, 이촌동 산책길, 부군당 산책길,독립의지의 길, 일제흔적의 길, 과거전환의 길, 철도명암의 길)로 구성된 산책로는 용산미군기지 담벼락을 따라 함께 걸으며 용산기지 일대에 펼쳐진 다양한 삶의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역사, 문화의 의미를 담은 길이다.
국내최초 주상복합 '좌원상가아파트'
국내최초 주상복합 '좌원상가아파트'. 지난 토요일 가끔 명물 떡복이집은 갔었지만 상가 주변과 옥상 내부는 처음으로 답사를 했다. 세운상가 유진상가가 국내 최초 주상복합인줄 알았는데 좌원주상복합이 몇년 더 빠르다.
춘추관. 백악남측.특별해설
54년 만에 개방된 백악산 남측 청와대 개방과 함께 길이 열렸다. 개방에 맞춰 하루 4회씩 10시.11시 14시.15시 해설을 위해 삼청동 금융연수원 건너편에서 출발한다. 총리.헌재소장 공관으로 오르면 춘추관 갈림길과 칠궁 뒤편으로 갈 수도 있다.
청량리역 시계탑, 대왕코너 화재
오랜만에 청량리역 시계탑을 다녀왔다. 높다란 시계판은 누렇게 변해 있었다.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MT 장소는 단연 강촌 대성리다. 그 당시 한결같은 모임 장소가 청량리 역 시계탑이었다. 또한 같은 추억의 역 광장에 대왕코너가 있었다. 이곳은 1970년대 세번의 화마가 할퀴고 간 건물이다.
태평로 서울시의회 자리는 엄귀비 사당(덕안궁)
세종로 광화문 서울시의회 건물을 가려고 시청역에서 내려 걸어 간다. 내 유년시절엔 지금처럼 의사당 앞으로 걸어 다니지 못하고 건너편으로(지금의 프레스센터 방향) 걸어 가곤했다. 지금은 남쪽으로 출입구가 변경 되었지만 당시는 도로에서 바로 출입문이 있었다. 이곳은 1935년 부민관으로 개관 하였다. 2,000석의 근대식 다목적 공연장 이었다. 경성 부민관을 지은 곳은 영친왕 생모 엄귀비의 신위를 모신(덕안궁) 자리였다.
김구선생과 윤봉길의사의 회중시계 인연
윤봉길 의사 의거 전 김구 선생 2원 하는 회중시계와 6원 하는 윤봉길 의사 시계와 맞바꾼 일화로 유명하다. 1932년 4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리게 된 일왕의 생일축하 행사.윤의사의 도시락 폭탄 의거 준비. 거사 떠나기 전 윤봉길의사는 평소 존경했던 김구선생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자신의 시계와 교환해 찾다.김구선생은 광복 후에도 이 시계를 간직하며 윤의사를 기렸다고 한다.
조선호텔이 최초 호텔? 배불호텔이 최초
우리나라 최초 호텔은 경인선 철도 개통 전인 1888년 건립 된 인천 대불호텔이다. 또 조선호텔보다 더 오랜 된 정동구락부로 불리던 1902년 손탁호텔도 있다. 조선호텔은 1914년 지어졌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대신사출세기념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삼일대로 457번지에 위치한 천도교 중앙대교당 문화극장이다. 공식명칭은 천도교 중앙대교당 대신사출세기념관. 올해가 천도교 대교당 건립 100주년이다. 솥뚜껑 극장이라 불리도 했던 문화극장이라고 천도교당 입구에 있었다. 1950~ 1970년까지 천도고 중앙대교당 입구 왼쪽에 자리했던 문화극장이다.
왜고개 성지
서울에는 250여 개의 고개가 있다. 용산에 있는 왜고개. 왜?라는 이름은 한자로 와현 '瓦峴' 또는 와서현 '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 초기 설치되어 1882년까지 유지되었고 현 서울 명동 주교좌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이곳에서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서울에 ‘도둑촌’이란 동네가?
용산구청에서 보광동 가기 전이 동빙고동. 지금은 중동•아프리카 대사관타운 거리다. 1970년대 이 지역을 도둑촌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를 사상계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김지하 詩人 창작 판소리 ‘오적(五賊)’ 중 시대적 배경이 군사정권일 것 같고 해서 오래 전 김지하 당시에 도둑촌을 묘사한 판소리가 있었다. 1970년 발표되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김지하의 오적. 을사오적도 아닌 오적을 판소리 미학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담시(譚詩)를 내 놓았다.
42년 서울극장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던 현 서울극장 자리는 1964년부터 세기극장이 있었으나 1978년에 합동영화주식회사가 인수하면서 1979년부터 2021년까지 42년간 운영하다 결국 2000년대 이후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 밀려 문을 닫았다. 서울극장은 영화관 운영과 더불어 서울아트시네마와 인디스페이스 등 대관 사업을 하는 등 자구책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 했다.
김세중미술관(서울 용산구 효창원로70길 35)
김세중미술관(서울 용산구 효창원로70길 35) 1955년부터 사시던 가옥을 지금은 미술관으로 운영중이다. 일부러 찿아가지 않으면 도로 옆도 아니고 주택단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찿기가 쉽지 않다.
세종로에 있던 3대 극장, 아카데미극장
서울 한복판에 아카데미극장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체부동 살 때 사촌 형과 자주 갔던 세종로에 아카데미극장과 국제극장 그리고 시네마코리아까지 모두 세 곳의 영화관이 있었다. 아카데미극장은 1970년도 조선일보사가 코리아나 호텔을 건축하면서 극장부지까지 매입해서 극장은 철거되었다. 옛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옆 건물 바로 건너편이 옛 세종로 아카데미 극장이다. 옛 국회의사당과 아카데미극장 사이에 있는 건물은 옛 조선일보사 본사 건물이다.
서울미래유산, 명동 마샬미용실
유네스코 회관 옆 명동 골목에 1962년 문을 연 뒤 올해로 60주년 되는 미용실 ‘마샬’이다. 1960년대 유행의 주도권이 종로에서 명동으로 넘어 오던 그때 개업한 미용실이다. 유명 고데기 브랜드 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마샬. 그 전통을 이어 받아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80~90년대 미스코리아들의 단골 멘트는 잘 알려져 있다.
제주 최초의 유료도로, 5•16 도로 건설 유래
‘국토건설단’에 의해 만들어진 5.16도로는 도민에게는 혜택이겠지만 단지 병역을 기피했거나 부랑자, 또는 시국에 대한 불순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잡혀가 죽도록 고생하고 다치고 죽었던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억압'의 상징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전두환이 만든 삼청교육대가 있었다면 박정희는 '국토건설단'을 만들어 도로 공사현장에 투입되었다. 한라산 동쪽을 가로질러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연결하는 한라산 횡단도로, 5.16도로. 일주도로가 제주 전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면 5.16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1시간 거리로 단축시켜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남과 산북을 잇는 대동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1962년 2월 16일 제주도지사인 김영관 해군소장은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김영관 제주도지사에게 한라산 횡단도로 총괄을 맡겼다.
남대문 ‘아지노모토’ 근대건물
가끔 가는 남대문 꿀 호떡 파는 곳(서울 중구 남대문로 19. 현 삼영빌딩) 건너편에 1933년에 건립 된 근대 건물이 아직 있다. 6.25 전쟁을 겪고도 파괴되지 않고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의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신옥) 당시 옛 아지노모토(味の素) 조선사업소 사옥이다. 요즘 건물에서 보기 힘든 반원형 창문으로 되어 있는 독특한 경관을 지닌 4층짜리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들어 온 조미료 아지나모토는 빠른 시간 내에 우리의 입맛을 지배했다. 일본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한식요리 김장김치, 간장, 고추장에 이르기까지 아지노모토 조미료를 넣을 것을 권해지면서 점차 조산 사람들의 입맛은 일본 조미료에 길들여지게 되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도 심부름으로 미원, 미풍 조미료라고 아니하시고 무조건 아지노모토라고 하셨다.
한 때 공포의 대상이던 건물이 ‘사랑의 열매’로
시청에서 경복궁 이나 세종로 갈 때 성공회 성당 언덕(西峴)을 좋아라 해서 돌아간다. 조선시대는 서부학당이 있었던 황토 마루다. 옛 국회의사당 앞으로 해서 오르면 정면에 붉은색 건물이 보인다. 현재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방송국 있던 자리. 이 건물은 군정시절 1979년에 준공 된 정동 빌딩. 얼핏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 건물은 근대 1세대 건축가인 김수근이 설계했다. 건물 양쪽에는 원통형의 구조에 계단으로 되어있고 원형 비상계단은 동일인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과 닳았다
감귤봉진(柑橘封進)
감귤봉진(柑橘封進) 제주 귤 수확 철이다. 조선 숙종시절 제주목사 이형상이 부임 했을 때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간 걸쳐 순력도 (巡歷圖, 목사가 도내 고을을 돌며 그린 기록화) 아래 기록화는 감귤봉진(柑橘封進)이다. 관덕정 망경루(望京樓) 앞 뜰에서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하는 귤 껍질을 궁궐에 봉진 하려는 그림이다. 망경루 앞에서 제주여인들이 귤을 종류별로 나누고 있고 이형상 목사는 연회각에 앉아 점검하고 있다.
영성문(永成門), 사랑의 언덕길
1954년 소설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등장하는영성문(덕수궁 선원전(璿源殿) 영역에 진입하는 관문이었던 문)길은 연인들의 사랑을 속삭이던 사랑의 언덕길로 표현했다. 영성문 언덕길은 유서깊은 덕수궁(경운궁) 돌담이 드높이 쌓여있고 미 대사관 관저 돌담이 높기만 하다. 좌.우편 담 안에는 나무들이 담장 밖까지 울창한 가지를 내 뻗어서 6.25 전쟁 후 영성문 언덕길은 마치 자연의 터널 같았다. 그래서 남의 이목을 꺼리는 젊은 남여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영성문 언덕길을 찿았던 것이다.
옛적에 가정상비약 '이명래 고약'
지금은 좋은 신약이 나오지만 이명래 고약은 옛날에 등창.종기에 붙였던 상비약이었다. 중림동 약현(藥峴)에 위치한 이명래 고약 공장은 다른 업종으로 바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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