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 방 사건을 보며, 아들에게 쓰는 글

기사입력 2020.03.27 17:08 조회수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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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jpg

사랑하는 00에게,

지금 온 나라가 텔레그램의 ‘박사’라는 녀석 때문에 시끄럽다.
 
아마 너도 뉴스를 통해 텔레그램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전모를 모두 알고 있을 거야.
아빠는 당연히 네가 비싼 돈까지 지급하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그러진 욕망의 방에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았으리라 믿는다.

그런데도 오늘 네게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아빠가 꼭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야.

너와 비슷한 또래의 이십 대 청년 중에 일부가 '그깟 야동 하나 본 죄로' 여론이 유료 회원들을 너무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는 뉴스가 나오더라. 혹시 너도 그런 생각에 내심 동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구나.

최대한 너희들 처지에 공감하며 변론을 하자면, 그동안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누리는 이런저런 제도적 혜택 등을 보며 오히려 너희들이 역차별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아빠의 눈에도 너무 극렬한 페미니스트의 어떤 주장들은 가끔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과격하고 비합리적이고 피해 의식적으로 보일 때도 있으니까.

피해 의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연령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시대의 희생자라고 모두 주장하는 형국이 돼버렸다.

태극기부대 노인들도, 퇴직 이후 노년의 삶이 불안한 중장년들도, 아이들 교육 문제로 허덕이는 삼사십 대 부부들도, 취업이 막혀 암울한 이십 대 청년들도 모두 예외는 아닌 것 같다.
 
환경이 열악해지며 점점 인간다운 삶의 질을 누릴 기회가 줄어들면서, 다들 캄캄한 산길에서 이러다가 조난을 당하는 건 아닌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가는 형국이 아닐까?

아빠가 너희들을 변호한다는 의미는 그런 관점에서 어느 정도 젊은 청년들의 억울함이 담긴 항변이라고 이해한다는 뜻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 그런 보호막 뒤로 숨어서 무력하게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혹시 네가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호기심에 끌려 가담하지도 않았고, 그 방에 참가한 애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라고 말해 준다고 하더라도, 아빠는 아직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단다.

그건 바로 '피해자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야.

이번 사건을 두고 SNS에서 수많은 의견이 봇물 터지듯 올라왔는데, 그중에서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인터넷 강의를 하는 어느 강사의 일침이 아빠의 눈에 들어오더라.

그 강사는 ‘야동을 보거나 소지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포르노와 불법 도촬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이 모두 인간 이하의 대상으로 취급당하는 폐해를 강조하고 있었어.

그러면서 예를 들기를, 우리가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의 반려동물을 마주쳤을 때, 너무 예쁘다고 쓰다듬거나 만지는 일을 하곤 하는데 반려동물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는 얘기였지.

비록 말도 못 하고 표현을 못 하지만, 엄밀히 말해 반려동물이 귀찮아하거나 불쾌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선의의 행동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요지였어.(사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반려동물이란 말 대신, 애완동물이라고 해서 장난감과도 같은 존재로 생명체를 대하곤 했단다.)

아빠가 어릴 적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현격히 낮은 시대여서 사회에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이 만연하던 때였어.

게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분에 아빠는 비교적 유복하고 부족할 것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 너희들처럼 피해 의식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아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성을 바라볼 때 아끼고 보살피고 돌봐줘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혔는데, 이걸 어려운 말로 ‘시혜적 태도’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지.

상대보다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며 뭔가 부자가 가난한 이웃에게 베푸는 심정이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던 거야.

아빠는 젊었을 때 그 정도로 내 안의 내면에 자리 잡은 자가당착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냈다고 고백을 하고 싶어.

그렇게 지내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누군가를 만나서 진심으로 사랑하려 했지만, 시대에 한참이나 뒤떨어진 방법을 고수하다가 내 안의 낡은 틀이 부서지는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말았지.

나는 사랑하는 네가 아빠처럼 너무 늦은 시기에 감당하기 힘든 무지의 대가를 치르며 목숨까지 위협받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기우에 불과하겠지만)

이번 사건에서 무참히 짓밟힌 피해자들의 인권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며,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성 인지 감수성‘을 키워서 부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키워나가길 진심으로 기원할게.

사랑한다,
아빠가.

김광진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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