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문화표석(文化標石)’ 따라 걸어 보실래요?

기사입력 2023.07.04 23:14 조회수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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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여행, 걷기는 더더욱 그렇다.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차이가 아니라 아예 못 본 것이다. 서울 도심에는 무려 320개가 넘는 문화표석(文化標石)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글쓴이도 이런 표석이 있다는 걸 가끔 스치듯 보았지만 이 표석이 가지는 뜻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 후 서울 도심을 걸으며 서울의 멋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표석(標石)’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을 표지하기 위하여 세우는 돌’인데 서울 문화표석은 서울의 현존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설치한 표석(돌)을 말한다. 도시가 급격히 개발되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 흔적조차 사라져간 역사적 장소에 표석을 설치해 시민들이 그 시대의 생활상과 의미를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처음에는 화강암 등 돌로 만든 표석이 설치되었지만 지금은 스테인리스 스틸로 표석으로 변해 시각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서울 전역에 다수 설치된 문화표석들을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바라보자. 새로운 서울의 의미가 보일 것이다. 서울시는 이 문화표석들의 위치와 문구, 사료들을 디지털화 해서 지도와 데이터베이스로 공개하고 있다. 


서울 문화표석을 보려면 https://map.seoul.go.kr/smgis2/short/6NtL3에 접속하면 된다. 아래 사진처럼 사회, 정치, 문화, 자연지리, 경제, 항일독립 등 주제별 분류도 해 놓아 관심 주제별로 찾아볼 수도 있다.표석 지도.jpg1985년부터 ‘역사문화유적지 기념표석 신설 및 정비계획’에 따라 설치되기 시작했는데 관청, 유명인사의 생가와 거주지, 명소, 성터, 천연수, 고목, 항일의거지, 근대문화예술인들의 연고지 등이 있다. 이 지도에서 보듯 이렇게 많은 표석들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오늘은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지하철 노선을 따라 서대문 이화여고까지 약 5km를 4시간에 걸쳐 천천히 걸으며 주요 문화표석, 경성궤도회사터~동대문전차 차고터~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터~이교터~최시형순교터~세창서관터 ~우미관터~육의전터~한성전보총국터(사역원터)~협률사원각사터~동양극장터~ 서대문정거장터에 대해 배워본다.

동대문전차 차고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279

경성궤도회사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86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9-2

이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03-2

최시형순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화문로 26

세창서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25

육의전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51

김상옥의거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65

우미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84

한성전보총국터(사역원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협률사원각사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 240

동양극장터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1 68

서대문정거장터

서울특별시 중구 통일로4 30

서울문화표석.jpg

지하철 1호선 동대문역을 나와 6번 출구 구 이스턴호텔정문 옆에는 ‘경성궤도회사터’ 표석이 있다. 이곳이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뚝섬과 광나루까지 도심과 외곽지역을 운행하던 시발점과 궤도전차(기동차라고도 불렸다)가 운용하던 경성 궤도회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당시 협궤전차는 뚝섬, 광나루 해수욕장 나들이 가는 여객수송과 생활 물자수송 등도 담당해 여객 화물을 동시에 수송하던 중요 교통시설이었다.DSC09011.JPG흥인지문 건너편으로 넘어와 메리어트호텔 알 동대문역 8번 출구 옆에는 ‘동대문 전차차고터’ 표석이 있다. 궤도전차보다 이른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종로나 청량리방향으로 가던 전차 종점 차고가 있던 표석이다. 1898년 설립된 한성전기회사가 고종황제의 의중에 따라 미국과 건설계약을 체결하고 남대문~종로~동대문~홍릉 노선을 완공, 1899년 5월 17일 성대한 전차개통식을 가졌다.


개통 후 3개월 후인 8월에는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선로가 완성되었으며 12월에 종로~남대문, 남대문~용산 연장 선로가 완공되었다. 다음해인 1900년 7월에 남대문에서 의주로를 거쳐 서대문 밖까지 개통했다.DSC09024.JPG

종로5가 역 3번 출구를 나와 정면으로 80여 미터를 걸어가면 좌측 서울 효제초등학교 정문 앞에 ‘공립어의동보습학교(公立於義洞實業補習學校)터’ 표석이 있다.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는 1910년 개교한 이래 경기공업고등학교, 서울산업대학 등 여러 차례 학제 개편·이전을 통해 오늘날의 서울과기대가 됐다.

 

1909년 대한제국 시절 일본 제국에 맞서 자주적 근대화 교육과 실업 교육을 위해 순종황제는 강한 열망을 갖고 실업학교령(칙령 제56호)를 반포, 1910년 4월 15일 종로구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조선시대 인조와 효종의 잠저(潛邸, 임금으로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또는 그 동안에 살던 집)였던 어의궁이 있던 터를 기반으로 하여 고등교육기관인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를 설립한다.DSC09028.JPG

종로5가 역 1번출구를 나와 보령약국앞 광장시장이 보이는 건너편에는 이교(二橋)터 표석이 있다. 이교는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옥류천과 종로대로가 만나는 곳에 놓여 있던 돌다리로 동대문을 지나 도성 안으로 들어올 때 두 번째로 건너는 다리라 이교라고 불렀다.


동대문 내 제 2교 또는 제2 두다리라고 했으며 연지동 근처라 연지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이교는 조선시대 임금이 선농단(先農壇, 조선 시대에 신농씨와 후직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지금의 제기동역 쯤)과 왕릉에 행차할 때 지나던 다리로 너비는 8미터 정도였다.DSC09029.JPG이교를 지나 종로3가 역 10번 출구 단성사 앞에는 여러 문화표석들을 몰려 있어 한꺼번에 많은 문화표석들을 볼 수 있다.  좌포도청터, 최시형 순교터, 파자교터 등이다. 최시형 순교터는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이 처형된 좌포도청 교형장 순교지이다.

 

최시형은 1898년 4월 6일 새벽에 체포되었는데 이미 관군의 추적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던 최시형은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낸 후 관병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 이송된 후 10여일 간 온갖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초췌한 모습이 표석 뒤 사진에 나타나 있다. 해월은 결국 교수형 선고를 받은 후 이곳 좌포도청으로 옮겨져 교형이 집행되었다.


교형 후 해월의 시신은 광화문 밖에 버려졌는데 이종훈이 수습해 송파에 살던 이상하의 집 뒷산에 안장했다가 1900년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천덕산으로 이장했다. 한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의암 손병희는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가 된다. 1대 교조 수운 최제우가 1864년 참수를 당한 데 이어 1898년 2대 교조 해월 최시형마저 처형을 당하자 제 3대 교조가 됐다. 훗날 동학은 천도교로 개칭했다.

DSC09039.JPG단성사터 건널목을 지나 파고다 공원방향으로 직지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로변에 표석이 있다. 세창서관(世昌書館)터이다. 1930년대 설립된 서점 겸 출판사 세창서관은 서적출판과 보급에 평생을 보낸 신태삼(申泰三)이 1984년 타계하기 전까지 전 생애를 바쳐 지켜온 출판사이다. 우리나라 초창기의 출판사들이 대부분 사라져 간 가운데 오직 세창 서관만이 살아남아 있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


세창서관은 해방 이후 활자본 고전소설을 활발하게 간행, 즉 고전소설의 시대적 소명이 희미해진 시기에 상당한 양의 활자본 고전소설을 간행했다. 신태삼사장 타계 후 지금도 그 지리에 그의 아들 신호균이 명백을 이어 가고 있다.

DSC09048.JPG태창서관터을 뒤로 하고 파고다공원사거리에서 삼일빌딩 방향으로 신호를 건너면 옛 종로서적방면 대로변에 우미관(優美館)터 표석이 보인다. 영화 김두환과 TV 드라마 야인시대의 배경으로 유명했던 우미관은 1912년 건립되었는데 조선인 전용 영화관으로 개관했다. 당시 영화가 무성영화라서 변사가 남여배우 역할을 하며 대사를 연기하며 들려주었다.


1916년에는 무려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특약을 체결하여 조선에서 유니버설 영화를 독점 상영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면서 우미관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1924년 5월 건물 화재가 일어나 그 해 12월에 재건해 명백 유지한다.


8.15 광복 이후에도 꾸준히 상영관 영업을 했는데 1959년 또 다시 화재로 건물 전체가 전소되자 길 건너편 현 YMCA옆 골목에 새로운 우미관으로 옮긴다. 이 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해 1960년대부터는 2류 재개봉극장으로 겨우 버티다 결국 적자운영을 피하지 못해 1982년 11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초의 우미관터에는 현재 우미관호텔이 영업 중이고 화재로 전소돼 길건너로 이전했던 터에는 현재 파노라마 뷔페 식당이 들어서 있다.DSC09056.JPG


DSC09058.JPG우미관터를 지나 종로방향으로 건너오면 종각역 8번 출구 바로 앞에 검은 색 스테인리스 표지석이 조그맣게 서있다. 김상옥의거터 표석이다. 김상옥의사는 1923년 1월 12일 밤 종로경찰서(당시 종로경찰서 자리가 현 YMCA 부근)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장기간 추적을 피해오다 현 대학로 부근에서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마저 떨어지자 벽에 기댄 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마지막 1발을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쏘아 자결해 순국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것은 3.1 운동 이후인데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해 종로경찰서 폭탄의거를 일으킨다.


앞에 설명한 공립어의동실업보습학교터가 있는 효제초등학교에 김의사의 유언 어록 비문이 세워져 있으며 자결한 장소 부근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는 김상옥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그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김상옥로로 명명되었다.DSC09065.JPG김상옥의거터 표석에서 40여미터 직진하면 종로타워 앞 광장에 육의전(六矣廛)터 표석이 있다. 그런데 이 표석은 지금까지 표석과는 다른 형태여서 찾기가 쉽지 않다. 광장에 쉴 수 있는 육각형의 검정이자 형태의 여러 대리석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쉼터용 의자가 문화표석이라고는 상상이 안된다.


육의전(六矣廛)은 서울에서 으뜸가는 시전으로 종로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가지의 어용상점(御用商店)을 말한다. 명주, 종이, 어물, 모시, 비단, 무명을 팔았으며 나라에 필요한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권,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어 조선 상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육의전이 있던 종로거리를 종루(鍾樓), 또는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렀다. 운종가는 보신각을 중심으로 동쪽은 연화방(지금의 연건동 일대), 서쪽은 혜정교(광화문 우체국 동쪽 복청교 자리), 남쪽은 훈도방(지금의 을지로 2가), 북쪽은 안국방(지금의 견지동) 등 4개 권역으로 나뉘었다.DSC09067.JPG육의전터를 지나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가면 광장 앞 두 갈래 초입에 한성전보총국(漢城電報總局)터와 사역원(司譯院)터 표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 도입 기관인 한성전보총국은 조선 고종 22년(1885)에 서로 전선(1885년에 준공된 한성∼의주 간 전신선)을 운영하기 위하여 청나라와 합작하여 서울에 설치한 전보국이다. 산하에 인천ㆍ평양ㆍ의주 분국을 두었고 운영은 청나라가 했다. 1894년에 청일 전쟁으로 일본군에 서로 전선을 점령당하자 폐선되었다.


사역원(司譯院)터도 같은 자리에 있다. 사역원은 고려·조선시대 외국어 통역과 번역, 교육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설치한 통문관(通文館)의 후신으로 태조(太祖) 2년(1393)에 설치되어 고종(高宗) 31년(1894)까지 업무를 보았다. 당시 외국어는 한학(漢學:한어), 청학(淸學:여진어), 몽학(蒙學:몽고어), 왜학(倭學:왜어) 등을 주로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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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C09082.JPG새로 건축한 새문안교회 앞길에는 협률사(協律社), 원각사(圓覺社)터 표석이 있다. 1902년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기 위하여 당시 한성부 야주현(漢城府 夜珠峴: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앞)에 있었던 황실건물 봉상사(奉常寺)의 일부를 상설극장으로 설립했다. 이 극장은 전국의 판소리 명창·가기(歌妓)·무동(舞童) 등이 모여 전속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관급(官給)을 받으며 연희를 했는데 협률사는 이후 대중적인 연희장으로 변모했다.


1902년 12월 창립공연작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유료 무대공연-기녀들의 춤과 판소리, 명창들의 판소리, 재인(才人)들의 곡예 등 전통연희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1903년 2월부터는 배우들의 공연이 중지되고 기생들의 예능만이 공연되었다.


개화기의 사설극장인 협률사가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로 사용되다가 1908년 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이인직(李人稙) 등이 건물을 임대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만들었다.


원각사는 판소리·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고 때로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 극장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新演劇)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DSC09086.JPG원각사터를 지나 강북삼성병원 맞은편 문화일보 사옥 앞 대로변에 동양극장(東洋劇場)터 표석이 있다. 현 문화일보 사옥 자리가 바로 동양극장이었다. 동양극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평양출신 홍순언(洪淳彦)이 아내이자 무용가인 배구자(裵龜子)와 함께 서대문구 충정로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전용극장으로 당시 한국 대중극의 중심지였다.


조선극장(朝鮮劇場)·단성사(團成社)·우미관(優美館) 등이 주로 영화상영·음악회·가극대회를 위주로 하는 극장이던 상황에서 동양극장의 설립은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중은 연극을 통해 시대에 눈을 뜨자 감상 수준도 함께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극장들은 수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한국인 극단에게 비협조적이었기에 연극 공연이 쉽지 않았다.


동양극장은 개관 뒤 10년,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역사를 간직한 채 실제로는 건물만 남은 대관극장으로 전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영화관으로 다시 사용되다가 1976년에 폐관되었으며 이후 현대그룹이 인수해 교육장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에 완전 철거된다.

20230429_204851.jpg문화일보 옆 농업박물관 뒤 이화외고 정문 앞에는 서대문정거장터 표석이 있다. 서대문정거장은 경인선 개통 당시의 시발역이었고 대한제국 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존재했던 경부선의 종착역으로 개통 초기부터 한동안 경성역(京城驛) 역할을 했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로 1899년 9월 인천~노량진 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 한강철교가 준공됨에 따라 서울~인천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경부선이 철도가 개통되면서 그 위치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어 경성정거장은 외진 공간의 종착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05년 5월 남대문역이 개설돼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되자 서울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남대문역으로 이전 되자 위상을 잃고 말았다. 당시 일본인들 거주지역이 남산 일대와 용산지역에 편중되어 있어 서대문정거장 보다는 접근성이 용이한 남대문역과 용산역으로 이동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힘의 논리였다.

20230429_184418.jpg지금까지 동대문에서 서대문까지 옛 전자 길을 따라 서울문화표석을 찾아 걸어봤다, 더 많은 표석들이 있지만 글쓴이의 주관에 따라 걸었기에 지나친 곳이 더 많으니 서울문화표석 지도를 참조해 원하는 길을 걸으며 그 터에 숨어있는 역사이야기를 찾아보기 바란다.

단무원심 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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