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金)을 던진 포구(浦). 김포

기사입력 2021.08.30 11:50 조회수 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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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jpg

김포시(金浦市)는 대한민국 북서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해 한강의 퇴적으로 충적토가 쌓여 밥맛 좋은 오천년 전통 김포(금)쌀 생산지인 김포평야를 끼고 있다. 북쪽은 한강을 끼고 북한 개성시와 마주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파주시, 고양시와 마주보고 있고 서울 강서구, 인천광역시 서구와 계양구, 서쪽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마주보고 있다.


김포는 경기도 1,000년 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명이다.
김포의 옛 이름 검포(黔浦)의 ‘黔’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의 ‘儉’과 같은 의미의 고대어로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신군(神君)이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땅이라는 의미이다. 김포의 수많은 지석묘가 고대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지역이었음을 나타낸다.

김포 지명 유래로 兄弟投金(投金浦)의 고사가 알려져 있는데 고려 공민왕(고려 31대 왕, 1351~1374) 때를 배경으로 한다. 공민왕 때 형제가 길을 가다가 황금 두 덩어리를 얻어서 나누어 가졌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형제가 함께 배를 타고 가다 별안간 아우가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다. 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아우는 “내가 평소에는 형을 사랑하였으나 지금 금 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형이 미워 보입니다. 따라서 이 물건은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차라리 이것을 강물에 던지고 잊어버리려고 그랬습니다”고 대답했다. 형도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며 역시 금 덩어리를 강물에 던졌는데 그 이후 이 강을 투금뢰(投金瀨)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즉, 금(金)을 던진 포구(浦)라 한 데서 비롯돼 김포라 명명됐다는 것이다. 그 양천강(지금의 양천구 공암진: 옛날 김포군 양서면 소재)이 전설에서 민담으로 회자 되어 ‘신동국여지승람’ 양천현에 소개된 이야기다. 당시 양천구(양서면), 강서구(양동면)이 옛날에는 김포 땅이었다.김포시청.jpg
김포일대 역사가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삼국시대 각국의 각축장이었던 장수왕 63년(475) 고구려가 한강하구 지역을 차지하면서 부터이다. 김포는 지리적•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사기-지리지편에서 검포현(黔浦縣, 김포읍, 고촌면, 검단면), 수이홀(首爾忽, 양촌면, 대곶면), 평회압현(平淮押縣, 통진면, 월곶면], 동자홀현(童子忽縣, 하성면, 제차파의현, 양동면, 양서면)이 기록돼 있다.

삼국시대 김포
마한의 소국 중 하나인 속로불사국이었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당시의 지명은 전해지지 않고 고구려 장수왕 시기 일시적으로 고구려 영역이 되었는데 이 때는 검포현(黔浦縣)으로 불렸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 영역이 됐고 9주 5소경 중 한 주에 속했으며 이후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행정제도 개편으로 김포현(金浦縣)이란 이름이 되었고 장제군(長堤郡)의 영현이 되었다. 원래의 영역은 현재의 김포 시내와 고촌읍, 검단 지역 일대였다.

김포장릉.jpg

고려시대 김포
1182년 고려 명종(明宗)2년에 감무를 두었으며 1198년 고려 신종 원년에 어태(御胎)를 매장하고 현령을 두었다.

조선시대 김포
조선시대인 1632년 인조 10년 북성산(北城山)에 장릉(章陵)이 조영된 뒤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 23부제 시행 당시 인천부에 편성되었다가, 이듬해 13도제 시행으로 다시 경기도 소속이 되었다. 구한말에는 한강변의 일부 월경지가 고양군에 편입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시 승격 이전까지의 김포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김포군(구래•마산동 제외한 동 지역 및 고촌읍, 인천 서구의 검단 지역)과 통진군(현 구래•마산동과  양촌읍, 통진읍, 하성면, 대곶면, 월곶면), 양천군(현재 오곡동•오쇠동을 제외한 서울특별시 강서구 전역, 양천구 전역, 영등포구 양화동)이 김포군으로 병합
1936년 양동면 양화리, 염창리와 목동리의 안양천(하류 부분이 직강화됨) 동쪽 지역이 경성부에 편입
1937년 양서면 송정리(현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 김포국제공항(당시엔 김포비행장) 개항.
1938년 군내면(현 김포시내)이 김포면으로 개칭
1963년 양서면•양동면(1914년 부군면 통폐합 이전의 양천군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
1973년 부천군 폐지로 인해 계양면과 오정면이 김포군으로 이관
1975년 오정면이 부천시로 편입(사실상 부천 환원)
1979년 김포면이 김포읍으로 승격
1983년 월곶면, 하성면, 양촌면의 각 일부를 분리하여 통진면 신설
1989년 계양면이 인천직할시에 편입됨으로 인해 부천시와 더 이상 접하지 않게 되면서, 경기도 한강 이남 지역에서의 월경지가 되었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가 출범하면서 김포군 전체를 인천에 편입시키려는 정부의 계획이 발표되었으나, 주민투표 결과 찬성 비율이 높았던 검단면만 서구에 편입되었다. 현 김포시는 검단면 인천 편입 직후의 영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98년 4월 1일 김포읍의 인구가 5만 명을 넘어서, 김포군이 김포시로 승격되었다. 김포읍은 김포1동(북변동, 감정동(일부), 걸포동)과 김포2동(장기동, 운양동, 감정동(일부)), 김포3동(사우동, 풍무동)으로 분할되었다. 시 승격 이후의 행정구역 변화는 다음과 같다.
2003년 9월 1일: 김포3동에서 풍무동을 분동(관할 법정동: 풍무동)함과 동시에 김포3동을 사우동으로 개칭(관할 법정동: 사우동)
2004년 1월 1일: 통진면이 통진읍으로 승격
2009년 9월 1일: 고촌면이 고촌읍으로 승격, 양촌면 구래리 일부와 마산리가 김포2동에 편입
2011년 11월 14일: 양촌면이 양촌읍으로 승격
2012년 9월 24일: 김포2동에서 장기동 분동(관할 법정동: 장기동(일부), 감정동(일부))
2013년 10월 28일: 김포2동에서 구래동 분동(관할 법정동: 구래동, 마산동)
2015년 2월 2일: 김포2동에서 운양동 분동(관할 법정동: 운양동)
2017년 4월 18일: 김포1동을 김포본동으로, 김포2동을 장기본동으로 개칭
2019년 9월 23일 : 행정동 구래동에서 마산동 분동(관할 법정동 : 마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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