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박촌동(朴村洞), 밀양박씨 집성촌이 마을 이름으로

기사입력 2022.01.02 09:54 조회수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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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촌1.jpg

(사진:계양구청) 

 

박촌동(朴村洞)은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양2동에 포함된 법정동 이름이다. 예로부터 밀양박씨의 세거지(특정 성씨가 대대로 모여 사는 마을)로 나라에 공 세운 인물 많은 박씨가 살아온 집성촌이기에 생긴 지명으로 박촌말(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양산의 북동쪽 능선은 신의주고개(시루지고개)를 지나 형제봉을 일으켜 큰 산괴를 만들고 굴재를 지나 소금뫼산, 모퉁이뒷산, 양지편 뒷산을 거쳐 당산까지 걸쳐있는데 박촌은 형제봉과 그 지봉인 금계산(金鷄山, 산 모양이 금계(金鷄) 머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금계봉)을 의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박촌은 금계봉, 형제봉과 이어지는데 형제봉은 두 봉우리가 나란히 있어서 형제봉산이라고 불렀다. 형제봉과 금계봉 사이에는 냉수물골(冷水井川)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의 물이 차서 조선시대 병방동에 주둔했던 군사들이 음료수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박촌의 북쪽은 굴재를 통해 귤현동으로 이어진다. 굴재를 넘어가는 길에 성황당이 있어 성황재라고도 했고 굴재의 동쪽 소금뫼산 쪽으로는 여우가 많아서 여우재라고 불렀다. 박촌의 서남쪽은 방축동, 남쪽은 병방동이다.

 

박촌 일대의 박씨는 박혁거세의 후손인 밀양 박씨 충헌공파(忠獻公波)로, 옛 동면의 박촌리•방축리•병방리 일대와 당산면의 벌말(평동)까지 300여 호가 넘는 대성씨를 이루고 있었다. 박씨들이 계양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 현종 때로 충헌공파 박강(朴綱)이 양주에서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다. 박강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인 박동흥(朴興東)은 아버지를 이어 이곳에 남고 두 동생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박흥동은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1남 박수(朴嬦)와 2남 박진(朴珍)은 병방에, 3남 박리(박理)와 4남 박조(朴琱)는 박촌에, 5남 박각(朴珏)은 벌말(상야동, 평동, 하야동)에 자리를 잡으며 집성촌을 이뤄 나간 것이다.

박촌.jpg

박촌동 휴먼시아 아파트로 진입하는 길 초입에는 묘역과 함께 ‘밀양 박씨 충헌공파 흥동종중회(興東宗中會, 회장 박진원)’의 건물인 밀성(密成)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묘역에는 중시조 박강과 장남 박흥동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가 단장되어 있다.
 
넓은 농경지를 가진 박촌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풍년를 기원하는 산고사를 지내왔다. 소양초등학교 뒤에 있는 넓고 두꺼운 바위를 제당과 상석을 삼아 상을 차리고 금계산신에게 고사를 드렸는데 산고사 혹은 대동고사라고 불렀다. 고사를 마치면 대동우물에 내려와 우물고사를 드렸다고 한다.
 
한편 인천에는 남동구에도 박촌(朴村) 이라는 마을이 또 있는데 만수4동 만수 주공아파트 주변이 박촌 이다. 이곳도 ‘박씨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는 흔히 이곳에 예로부터 반남(潘南) 박씨(朴氏)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져 내려 오는데 사실이었는지는 쉽게 확인되지 않는다. 전국에 박촌이라는 여기 저기 많이 있고 만수동 박촌 외에 하촌(하씨 성?), 함박마을, 신촌(신씨 성) 등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는 동네 이름들과 비교하면 박촌도 계양구 박촌동처럼 그냥 ‘박씨들의 마을’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이 같은 점을 두루 따져 일부 국어학자들은 박촌을 ‘박씨들의 마을’이 아니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밝’사상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밝’사상은 옛날 도읍지나 중요한 행정 관서가 있는 곳에서 때마다 주변의 산이나 바다에 마을과 국가의 평온이라든지 풍년, 풍어(豊漁)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때 그 바탕을 이룬 사상 체계를 말한다. 이런 일을 했던 곳의 땅 이름에는 흔히 ‘밝’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는데 이 글자가 나중에 변형이 되면서 ‘박’이나 ‘밭’이 된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확정할 수는 없지만 이곳 박촌이 철마산 바로 주변에 있으니 이 같은 해석도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겠다.(인천광역시 자료 발췌 편집)
 
이밖에도 우리나라 지명에는 성씨 이름을 딴 곳이 많은데 경기 광주 양촌(陽村)도 그 사례이다.
조선조 후기부터 이 마을에는 양(楊)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하여 마을이름을 '楊村'이라고 하다가 후일에 '陽村'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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