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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시장(9) 우전(牛廛), 우시장
한국의 전통시장(9) 우전(牛廛), 우시장
(사진:전국 한우협회) 소는 예부터 한국인의 삶과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며 중요한 가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살아서는 힘겨운 농삿일에 커다란 노동력을 제공해 주고 죽어서는 살코기•뼈•가죽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논•밭 다음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인간에겐 그야말로 꼭 필요한 든든한 재산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농우(農牛)들을 팔고 사는 우시장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전문시장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우시장은 쇠전 또는 소시장, 우전(牛廛)으로 불렸다. 이곳에서는 소만 거래하지 것이 아니라 돼지, 염소, 양 같은 가축을 같이 거래해 통상적으로 가축 시장이라 불렀다. 우시장이 서면 흥정을 붙이는 중개인인 ‘쇠전꾼’들이 달려들고 흥정이 벌어지게 된다. 예전에는 파는 이나 사는 이가 대충 눈대중으로 체중을 가늠해 가격을 정해 밀고 당기는 흥정이 정겨운 풍경이기도 했고 정든 한우가 새로운 곳에 가서도 잘 살 것을 당부하며 눈시울을 훔치기도 했다. 하지만 우시장 주변에는 투전꾼들이 모여들어 순박한 시골사람들의 피 같은 소판돈을 노리는 사악한 풍경들이 이때도 있었다. 우전에서 소는 외상거래가 거의 없고 현금으로만 거래되는 특성상 농가에서는 소를 자식처럼 키워 논과 밭을 장만 할 때, 자녀들 혼인할 때, 자식들 대학 학자금 낼 때도 소는 키우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부의 상징이었다. 우시장 풍경 중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여성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집 안에서는 여성의 경제권이 있지만 소의 거래에서는 오롯이 남성들이 몫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시장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 e영상역사관) 전국 곳곳의 주요 우시장이 있었지만 수원 주변의 넓은 들을 갈던 튼튼한 황소를 사고 팔던 수원 우시장은 예부터 이름이 높으며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인 수원갈비의 모태가 되었다. 경기 남부와 충청북도 북부지역에서 들어오는 소들을 주로 거래하는 충북 장호원(감곡)의 우시장, 충남 홍성 우시장, 판매와 도축이 함께 이루어지는 강원도 횡성의 우시장, 경기도 양평의 우시장, 전북 남원(함평)의 우시장 등은 각 지방에는 중요한 우시장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전국의 우시장들은 대개 새벽 2시경에 개장하여 오전 6, 7시경에 파장하므로 장이 서는 날 새벽이면 모여든 사람과 소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우시장은 왜 꼭두새벽에 열렸을까? 지금 현대화 돼 전자경매로 바뀐 우시장 풍경은 새벽이 아니었어도 가능했을텐데… 정확한 답은 없지만 그 시절 상황으로 이유를 유추해 볼 수가 있겠다. 그 옛날 장은 약속된 날에 편한 장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때 열렸다. 그러니 우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그래서 우시장은 그 지역 장날에 맞춰 함께 선 것이고 우시장이 새벽에 열려야 마치고 다른 장도 열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일찍 우시장을 파하고 이어 다른 장도 열리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자연스런 규칙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새벽에 우시장이 서야 도축장에 신선한 소를 공급할 수도 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시장이었던 주변에는 유명 한우 음식점들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시장이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부터이다. 소의 거래는 반드시 우시장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한우보존에 관한 훈령 및 시행규칙’이 시초였다. 이때부터 사설 우시장은 인정되지 않았고 부(府), 읍, 면장이 개설한 농회가 운영됐다. 지금의 가축시장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지만 기존 우전과의 마찰로 1921년에는 ‘조선가축시장회’라는 상인회가 설립돼 서울과 평양에 특설한 4개의 상설 우시장을 제외하고 과거 재래시장처럼 5일장으로 이어 갔다. 이후 1963년 ‘축산법’ 제정으로 차츰 질서를 찾기 시작했고 1964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667개의 우시장이 운영됐다. 1975년에는 경매제도가 시범적으로 도입됐고 1977년 ‘축산법’ 개정으로 종전의 거래방법인 중개 거래와 병행하여 경매제도가 이뤄지도록 법 제화되었다. 경매제도가 시행되면서 우시장에서는 우형기(소저울) 사용이 의무화되면서 눈대중에 의한 체중 문제, 거래가격 시비가 사라졌다. 초창기 우형기도 전자식 저울로 바뀌었고 수기식 경매도 전자식 경매로 진화되면서 옛날의 우시장 모습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전시대 때 소는 송아지를 잘 낳을 수 있는 암소인지, 힘을 잘 쓸 수 있는 황소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골반이나 다리발육 상태 등을 중점적으로 점검했으나 지금은 육질이 좋고 기름기가 적은지가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사진:덕담 박승우)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혼을 되살려낸 황혜성선생.평생을 바쳐 궁중음식의 전통과 맥을 이어온 장인이다. 황혜성(黃慧性 본관은 평해 1920.7.5~2006.12.14)선생은 1920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황선생은 처음부터 궁중음식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충청도에서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던 공주고녀를 나온 후 일본으로 유학해 후쿠오카시 지쿠시 여자고등학교(筑紫高等女学校, 현재의 지쿠시 여학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어머니의 배려로 교토여자전문학교(京都女子専門学校, 현재의 교토 여자 대학)의 가사과에서 일본 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공부했다. 5년간의 일본유학을 끝낸 후 귀국하여 2년간 대동고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서울의 숙명여전에서 가사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의해 1941년 숙명여전에서 영양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숙명여전 학장이었던 오다(小田)씨의 제안으로 궁중음식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일제치하였지만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궁인들과 거주하고 있어 아직 궁중의 법도가 남아 있던 창덕궁 낙선재로 찾아가 윤씨가 가장 아꼈다는 주방상궁, 한희순상궁을 찾아가 1972년까지 30년간 궁중음식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1970년 황혜성(왼쪽 첫번째)과 한희순(왼쪽 두번째) 등 윤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궁인들(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한상궁은 고종에 이어 순종, 순종비 윤황후를 모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 임금이 평소에 드시던 수라상부터 잔치음식, 제사음식까지 모든 궁중음식 조리법을 섭렵한 분이었다. 황선생은 상궁마마님이라 부르며 궁중음식의 재료부터 꾸밈새, 간 맞춤, 관련 용어 등 전 과정을 수기로 공책에 기록했다. 한희순 상궁의 제자, 황혜성에 관한 신문기사 (1968년 3월 5일)(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그런데 그 가르침이란 것이 체계적이지도, 글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눈동냥으로 익히는 것이어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당시는 대부분 상궁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요리법이 전수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으로 음식에 대한 생활사의 보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때인데 황선생은 이 때부터 왕실 음식의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정형화, 규범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황혜성 친필노트(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서각과 규장각 등을 돌아다니며 궁중음식에 관한 옛 기록들을 찾아내 손수 체계화시켜 간다. 그래서 탄생한 궁중요리 이론서 책이 1957년 발간된 ‘이조궁정요리통고’이다. 이조궁정요리통고는 구중궁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궁중음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국 음식 문화역사에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의 발간은 우리 요리가 학문의 한 분야로, 한국 음식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황선생은 생전에 "궁중음식은 한국 식문화의 정수"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두었다. 이조궁정요리통고(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71년 드디어 궁중음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 받게 된다. 황선생이 1943년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지 근 30년간의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이다.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궁중음식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전수를 위해 황선생은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다. 긍중음식연구원(전경) (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궁중음식연구원은 창립 25년을 맞아 1996년 처음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던 낙선재와, 한상궁의 사저가 안동 별궁과 가까운 곳인 창덕궁 옆 종로구 원서동 한옥으로 이전해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전시 등 활발한 활동한다. 윤황후가 거처했던 창덕궁 낙선재에 복원된 조선왕조 수라상(2014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된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차림 재현모습 (2017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1972년 문화재관리국 식생할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을 하며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로도 재직하며 관련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해 궁중음식 문화에 대한 학문적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미국, 일본, 프랑스,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궁중음식을 전시하고 강습해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데도 노력한다. 황선생은 대중매체를 통한 한국 궁중요리 전도사로 친숙한 분이기도 하다. “집념을 가지고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꾸준히 기록해 두어라”, “음식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라고 강조한 황혜성선생. 그의 손길에서 사라진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영원한 한국의 위대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상궁에서 황선생으로 계보를 이어가던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문화는 안타깝게도 2006년 12월 14일 오후 12시30분 서울의료원에서 향년 86세로 선생이 작고하면서 막을 내린다.황선생은 사후를 대비, 궁중음식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자녀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장녀 한복려씨가 무형문화재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둘째 한복선씨, 셋째 한복진씨가 전수자로 대를 잇고 있다. (‘지화자’라는 궁중음식 한정식 음식점 운영) 황혜성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명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성균관대학교 가정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 1957년 스승인 한희순과 공동으로 저작한 ‘이조궁정요리통고’를 시작으로 10권의 궁중음식과 전통음식 전문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저술‘이조궁정요리통고 (李朝宮廷料理通考)’ (1957년)‘한국요리백과사전’’한국의 미각’ (1976년)‘한국의 요리’ (1982년)‘한국음식’ ‘전통의 맛’ (1985년)‘한국의 식(韓國의 食)’ (1987년)‘한국의 전통 음식’ (1989)‘조선왕조 궁중 음식’ (1993)‘한국음식 대관-6권 궁중의 식생활’ (1997년)‘우리 음식 백 가지’( 1998년) 등 상훈대한민국 교육훈장 목련장 (1985년)문화훈장 보관장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