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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6년(676) 2월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대룡(大龍)과 부석(浮石)으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의상대사의 구도심(求道心)을 지켰던 선묘(善妙)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어 더욱 숭고한 종교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량수전 뒤에 있는 부석과 이 절이 개수(改修)될 때 무량수전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거대한 석룡(石龍)에 의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조사당(국보 19), 소조 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과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67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화엄사는 지리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창건 이래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어 황룡사의 승려 연기(煙氣 또는 緣起)가 신라 경덕왕 때 세웠음이 밝혀졌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중층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웅장한 규모이다.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다포의 복잡한 공포(貢包)가 중층의 팔작지붕 처마 밑에 꽉 차 있어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기다란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어서 웅장한 건물의 규모와 함께 각황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보물 제144호, 남북 15.8, 동서 10.1m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던 자장(慈藏)의 감명깊은 자기헌신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 절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가람배치는 이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앞에는 불사리에 참배할 수 있도록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지어진 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때의 건물양식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연화문 축대와 계석(階石) 문양이 남아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T자로 북쪽만 제외하고 합각(合閣, 용마루)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T자이고 법당의 평면은 방형이며, 뒷벽은 금강계단에 예불하기 위하여 벽으로 막지 않고 문을 달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놓았다. 또한 천정은 국화와 모란이 조각된 꽃천정으로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법당의 운치를 높여준다. 국보 제15호,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는 682년 의상(義湘)이 세운 사찰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내려 앉은 자리에 세웠다거나 또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른 의상을 청마(靑馬)가 안내하여 이곳에 앉았기 때문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중.후기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양 옆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다른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여겨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上樑文)에 1363년 건물의 지붕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인 조계산(曹溪山, 또는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함)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변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깊게 이어지고 수많은 계곡과 하천,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들이 있어서 명찰(名刹)과 더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을 당시에는 승려 30-40명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사(定慧社)가 이곳에 옮겨와 정착한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면서는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는 등 대찰(大刹)로 발전하였다.송광사에는 하사당(下舍堂, 보물 263호)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선객(禪客)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종의 승방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부엌의 기능을 고려하여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이는 용마루를 뚫어 환기구멍을 설치한 것으로 이러한 설비는 송광사 주변의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42), 『고종제서(高宗制書)』(국보 43)의 국보와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외의 수많은 보물이 있어서 명실공히 대찰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초가집과 기와집, 돌담과 흙담, 아기자기한 산과 시냇물,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서낭당, 사당, 향교 등등. 정적하고 단조한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 마을의 정황이다. 자연 경관을 중요시 했던 우리 민족의 주거 형태는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이처럼 조화와 균형 속에 배치되었다.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주거 문화는 선사시대의 움막과 원두막과 같은 생나무 집에서 출발하여 수혈 주거, 귀틀집, 초가, 기와집의 형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기원 전 4세기 경 농업 생활의 정착과 함께 우리의 고유한 난방장치인 온돌이 발명되면서 부터 초가집과 기와집이 일반화 되었으며, 기후와 생활 양식에 따라 홑집과 겹집,양통집, 곱은자 집 등의 다양한 형태가 생겨났다. 이처럼 집의 형태나 크기가 달라지면서 주거 생활의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곡물 저장과 가축 사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남녀의 활동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하기도 했다. [양반가] 보물 제414호,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양반가옥은 대체로 짙은 회색의 기와를 얹고 벽에는 흰색을 칠하며 이와 고동색의 나무색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왕궁이나 사찰에 있는 단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운데 이는 금지 이전에 꾸미지 않는다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건물들은 여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건물마다 고유의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안채, 남자와 그의 손님을 위한 사랑채, 그리고 하인을 위한 행랑채 등이 벽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직선으로 설계된 경계선 안에 질서있게 배열되어 전체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단정한 구성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대문을 다시 통해야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쪽에는 담장을 따로 쌓아 사당을 마련하였다.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낙안읍성 초가는 한국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이엉으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털털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이러한 초가가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선이 우리네 나직한 산등성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집의 울타리도 지붕을 닮아 각이 지거나 선이 곧은 것이 별로 없고 다만 땅이 생긴 모양대로 경계를 긋고 낮은 돌담을 울퉁불퉁 쌓거나 혹은 가는 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것이 전부이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벽으로 단순 소박하며, 방도 큰방/작은방/부엌과 헛간이 서로 붙어 'ㅡ'자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은 'ㄱ'자도 볼 수 있다. 그림은 전남 낙안의 벌교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한국 전통 초가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민속자료 33호,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김진호 집 너와집은 나무판이나 청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른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산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지역과 평안도 산간지역, 강원도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화전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적송이나 전나무 등을 가로 20-30cm, 세로 40-60cm, 두께 4-5cm 정도로 켜서 서로 포개어 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 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이 되게 눌러 놓기도 한다. 너와와 너와의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서 환기도 잘되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며, 단열효과도 커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하다. 그림은 대표적인 너와집으로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의 집으로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너와집은 산림보호책,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사적 제267호,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서울 한강변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대부분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에 속한다. 주거의 형태는 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수혈주거로 원형에 가까운 말각(抹角) 방형의 바닥을 마련하고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둘레에는 기둥을 세워 원뿔형의 지붕을 얹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식 주거형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원두막과 같은 형태이다.내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고, 간혹 저장구덩이가 있기도 하며,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뚜렷하다. 좁은 입구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바람을 막고 햇빛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다양하나 대체로 4-5인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당시의 가족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기와 화살촉, 그물추, 뼈바늘 등이 있는데 문 가까이에서는 화살촉 등 남성용구가 주로 발견되는 반면 문에서 가장 먼 곳에는 화덕이 있으며 그 근처에서 뼈바늘, 토기 등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거지 내에서 위치에 따라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식/주] 남성복식: 한국 옛 남자들의 옷 차림
[의/식/주] 남성복식: 한국 옛 남자들의 옷 차림
저고리는 여성복식과 마찬가지로 바지 위에 입는 남성들의 상의이다. 삼국시대의 긴 저고리리가 조선시대에 오면서 그 길이가 짧아짐에 따라 깃, 안섶과 겉섶, 품 등이 넓어지면서 변화를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의(袴衣)라고도 불리워지는 바지는 남성들의 외의(外衣)로 삼국시대 이전부터 착용되었다. 저고리의 변천과 함께 바지의 형태도 북방 한대 기후의 수렵 유목에 적합하도록 활동성이 요구되던 바지폭이 좁은 궁고(窮袴)에서 점차 폭이 넓은 대구고(大口袴)로 바뀌었다.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바지는 남녀 모두의 기본적인 하의로 겉옷이나 치마 아래에 입었고, 신분에 따라 바지의 폭, 길이, 색 등을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남자의 경우 바지는 계속 겉옷으로 착용되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각이 분리된 형태, 앞뒤가 절개된 형태, 사폭(斜幅)으로 구성된 형태를 보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또한 신장을 중심으로 폭을 잡아 제작되기 때문에 체형에 꼭 맞는 서양의 바지보다는 여유가 많아 좌식생활에 편리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는 두루마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미 상고시대 부터 입어온 우리의 민족복이다.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예를 갖추기 위한 의례복으로 그 착용 범위가 넓어진다.벽화의 두루마기는 저고리와 마찬가지로 깃, 소매, 부리, 도련의 선을 두르고 저고리의 맺음과 중복되지 않도록 두루마기의 띠는 뒤중심, 혹은 옆허리 주변에서 매도록 하여 기능적인 구조의 지혜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두루마기는 고려시대의 백저포(白苧袍)로 이어져 왕실과 귀족, 관료 및 평민의 평상복으로 착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보편적으로 착용한 겉옷으로서그 가짓수도 매우 다양하여 왕과 신하의 제복을 비롯하여 조복(朝服), 상복(喪服) 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직령포, 단령포, 창의, 중치막, 천릭 등과 같은 각종의 두루마기 형태로 발달하였다.특히 선비사회의 상징이랄 수 있는 옥색의 이 도포는 옷이 갖고 있는 풍성함과 너그러움, 권위의 장엄함마저 깃들어 있어 지고한 선비의 위엄을 느끼게 한다.(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의/식/주] 여성복식: 한국 옛 여인들의 옷 차림
[의/식/주] 여성복식: 한국 옛 여인들의 옷 차림
저고리 소매 배래선의 완만한 흐름과 하얀 동정의 정결성, 섶 코의 곡선, 옷고름의 선 등 한국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전해주는 이 한복이야말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와 긍지를 반영해온 독창적인 양식의 하나이다.예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옷의 기본형은 여자는 치마와 저고리, 남자는 바지와 저고리이다. 이 기본형의 한복은 최근 우리의 노년층에서 즐겨 입는 일상복으로서 여기에 덧붙여 속옷으로는 속저고리, 속치마, 고쟁이와 함께 버선을 든다. 한복을 용도별로 보면 평상시에 입는 일상복, 혼례 등 통과의례시 예를 갖추기 위해 입는 의례복, 또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제작된 특수복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외에 남성의 웃옷으로서 곧은 깃을 단 도포가 있다. 신분과 지위 표시가 명확한 관복인 경우는 둥근 깃을 단 웃옷에 빛깔과 장식으로 구분했다. 조선시대는 삼국 시대 이래의 복식 문화를 꽃피워 왕복, 왕비복, 백관복, 선비복, 서민복, 관혼상제복 등이 제정돼 한복 양식이 한층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었다.옷감으로는 삼베나 무명과 같은 식물성 섬유를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했으나 귀한 옷감으로 명주나 비단도 썼다. 또한 소박하고 검소한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 입어 백의민족이라고도 불리워 왔다. 저고리의 구성은 몸체를 이루고 있는 몸판, 깃, 여밈 부분의 섶, 팔 부분의 소매통 등으로 대별된다. 이 중에서 가장 변화의 폭이 심한 곳은 저고리 길이와 도련, 소매의 형태를 들 수 있다.섶은 저고리의 좌우에 각각 달리는데 기능적으로 양쪽의 앞을 여미는 여분이 되며, 미적으로도 변화의 선으로 형태미를 부여할 수 있다. 깃은 앞몸판에서 뒷몸판까지 연결되어 목둘레를 장식하며 한국 복식의 형태를 인식할 수 있는 특징 중이 하나이다. 옷고름은 기능적으로 의복을 정돈하는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갈수록 저고리의 길이는 짧아지고 옷고름은 점차 길어지면서 장식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정은 의복의 관리면에서 세탁하기에 편리한 방법으로 이용된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로 저고리의 단정함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치마는 저고리의 아래에 입는 여성의 하의로 형태는 치마의 몸체와 허리띠, 끈으로 간단하게 구성돼 있다.치마의 폭은 평면의 천을 이용하여 그대로 쓰지만 상부에 주름을 잘게 잡아 허리띠의 속으로 집어넣는다. 입을 때는 앞에서 둘러 입고 뒤에서 한 쪽으로 여며지게 하여 끈으로 묶으며 치마의 폭은 그대로 풍성하게 둥근 분위기를 나타낸다. 특히 치마의 형태는 잘게 잡혀진 주름이 아래로 수직적인 분위기를 주며 허리띠의 색을 흰 것으로 하여 치마색을 돋보이게 한다.치마는 폭이 넓어 우리나라의 온돌생활에 적합한 기능성이 있는 반면 뒷중심 여밈이 열리게 돼 있어 할동하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기품있고 우아한 멋을 더해준다. 고구려 시대 남녀 공용으로 겉에 입던 여자의 바지는 신라시대 이후로 오면서 속옷으로 변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앞뒤트임형, 무족의형, 남자 바지형으로 분화하였다. 또한 바지와 치마의 중간형인 시군, 말군이 입혔으며, 임진왜란 이후로 바지는 여러 형의 속곳으로 분화하여 속속곳, 단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남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입고 있는 하까마는 한복 중에서 여자 속옷인 앞뒤트임의 단속곳이 겉옷 바지로 입혀지는 예이다. 특히 남자의 바지형이 고정적인 데 비해 여자의 속바지는 몇개를 겹쳐입는 중복성 때문에 기능을 고려한 점이 있으며 이는 용변의 편리를 위하여 밑을 완전히 트거나 바지통을 크게 하여 발을 뺄 수 있도록 한 점이다.속곳은 치마의 풍성함을 살리기 위하여 미적인 측면에서 이용되기도 했으며 치마의 벌어진 사이로 속옷이 보여지는 점을 고려하여 무릎 아래 부분만을 곱게 누비거나 윗쪽은 무명으로 아래쪽은 명주로 하여 보이는 곳에 신경을 쓰기도 하였다. 서민층 여인들의 방한모로 사용된 처네는 같은 모양으로 크게 만들어 아기를 업는데 사용하기도 했다.통영의 침선장 이정련씨가 재현한 이 누비로 만든 처네는 안쪽은 진홍색을, 바깥쪽은 더러움이 안타는 검은천으로 하여 가운데 솜을 두고 꼼꼼히 누볐다. 처네 바깥의 검은 천 위에는 벽사의 뜻이 있는 박쥐와 부귀를 나타내는 모란꽃을 다홍, 분홍, 초록, 노랑 등으로 화사하게 수놓았으며 두 겹으로 접히는 처네 깃에는 흰색 동정을 달았다. 특히 아기를 업을 때 뒤에서 잘 보이도록 후수를 달았는데 후수에는 다홍의 비단 위에 십장생 등 길한 문양들을 수놓고 가장자리에 오색으로 술을 달아 아름다움을 더했다. 삼회장 저고리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변화한 독특한 저고리의 모습이다. 조선 중, 후기에 오면서 저고리의 형태에도 변화를 보여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했으며 섶, 끝동, 동정도 좁아져 전체적으로 작아진 느낌이다.황색 비단 저고리에 자주색 비단으로 곁막이, 끝동, 깃, 고름을 배색한 이 삼회장 저고리는 조선시대 양반댁 규수들이 착용했던 전용물로서 삼회장 저고리와 함께 다홍색으로 염색한 치마의 강렬한 색대비가 아름다운 이 황의홍상은 결혼을 앞 둔 처녀들의 정장으로 단정하게 치장을 할 때 입었다.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24절기란 무엇인가?
24절기란 무엇인가?
음력(陰曆, 太陰曆)이란 달의 차고 기울어짐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달력으로 고대부터 중국·바빌로니아·그리이스·유태·인도·이슬람 등에서 사용되었던 방식이다. 한국에서도 음력을 기준으로 거의 모든 생활이 이루어져 왔다. 즉 평년을 12개월로 하고 동지를 기점으로 황도를 24등분해서 계절을 세분하여 각 등분점에 태양이 통과할 때를 절기(節氣) 또는 중기(中氣)라 하여 모두 24절기로 정했다. 농본중심의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절기를 기준으로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읽었고 이것을 변화하는 계절과 생활의 길잡이로 삼았다. 이 곳에서는 오랫동안 우리 생활의 지표가 되어온 한국의 24절기에 관해 소개한다. 24절기의 첫번째 절기인 입춘은 음력 1월의 절기로 양력 2월 3, 4일경이고, 우수는 음력 1월의 중기로 양력 2월 18, 19일경이다. 언 땅이 녹고 땅 속에서 잠자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니고 초목에서 싹이 트는 시기이다. 입춘은 농촌에서 농기구 정비, 농사 정보교환, 보리밟기, 거름주기 등 농사의 준비가 시작되는 기간으로, 보리뿌리의 수나 바람의 강도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농촌과 일반 가정에서는 '춘첩(春帖)'이라 하여 '입춘대길(立春大吉)'같이 복을 기원하는 좋은 뜻의 글귀를 기둥, 대문, 천정 등에 써서 붙이기도 한다. 경칩은 음력 2월의 절기로 양력 3월 5, 6일경이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은 음력 2월의 중기로 양력 3월 21일이다. 이 때는 얼음이 풀리고 날씨가 따뜻해서 만물이 소생하는 봄으로 개구리나 뱀처럼 겨울잠을 자던 짐승들이 깨어나고 온갖 꽃이 피며 제비가 날아오는 시기이다. 농사가 시작되어 두엄주기, 객토넣기, 봄배추, 감자, 옥수수, 푸성귀 등의 씨 뿌리기를 하고 보리밭에 거름주기, 비료주기, 보리밟기 등을 한다. 경칩에 벽을 바르거나 담을 쌓으면 탈이 없다고 하며, 보리싹의 성장으로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청명은 음력 3월의 절기로 양력 4월 5, 6일경이고, 곡우는 음력 3월의 중기로 양력 4월 20일경이다. 청명에는 가래질, 논둑다지기, 논갈이, 못자리 만들기 등의 논농사 준비와 보리밭매기, 채소의 파종, 거름주기 등이 이루어진다. 이 때에 장을 담그면 맛이 좋다고 하여 1년 동안 먹을 장을 담그고, 누에를 치며 목화를 심기도 한다. 곡우에는 못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볍씨를 담근다. 이 무렵의 조기는 살은 적지만 연하고 맛있어서 서해와 황해에서는 조기잡이가 한창이다. 입하는 음력 4월의 절기로 양력 5월 5일경이고, 소만은 음력 4월의 중기로 양력 5월 21일경이다. 초여름이 시작되는 입하에는 모내기 준비가 이루어지고, 가을보리 먼저베기 등 밭농사의 김매기로 바쁘다. 소만 무렵에 모판에서 이앙한 모를 모내기하게 된다. 모내기는 품앗이 혹은 품을 사서 하게 되는데, 비가 많이 오면 동네에서 1주일 내에 끝낼 수도 있지만 물이 부족한 논은 한달 후까지 하게 되기도 한다. 모내기는 대개 남쪽보다 북쪽에서 먼저 시작된다. 망종은 5월의 절기로 양력 6월 5, 6일경이고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는 음력 5월의 중기로 양력 6월 21, 22일경이다. 여름이 한창인 이 때 농촌에서는 모내기와 보리타작이 이루어진다. 보리타작이 끝나면 밭에 콩, 팥, 조, 밀, 배추, 무를 선별해서 심고 거름주기, 김매기 등으로 한없이 바쁜 시기이다. 작은 더위라는 뜻의 소서는 음력 6월의 절기로 양력 7월 7일경이고 큰 더위라는 대서는 음력 6월의 중기로 양력 7월 23일경이다. 이 때는 여름이 한창이라 날이 습하고 더우며 때로는 큰비가 내린다. 농가에서는 퇴비 마련, 논두렁깎기, 모내기 끝난 논의 김매기, 콩·팥·조의 김매기를 하게 된다. 수박, 참외, 토마토, 호박, 오이, 감자 등 과일과 채소가 풍부하며 여름을 이기기 위해 보신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도시와 학교는 휴가철이고 농촌에서도 산과 들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때이다. 가을에 들어선다는 입추는 음력 7월의 절기로 양력 8월 7, 8일경이고, 처서는 음력 7월의 중기로 양력 8월 22, 23일경이 된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이슬이 내리며 쓰르라미가 우는 때로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고 벼가 익는다. 입추 무렵에는 무와 배추를 심고, 처서 때에는 벼이삭이 여물기 시작하므로 논에 허수아비를 세워 새쫓기를 하게 된다. 서리가 내린다는 백로는 음력 8월의 절기로 양력 9월 8, 9일경이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추분은 음력 8월의 중기로 양력 9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하늘이 높고 푸르며 오곡이 무르익는다. 밤, 대추, 사과, 감 등의 과일과 벼를 수확하고, 추석 명절이 있어 풍요로운 달이다. 논의 나락은 늦어도 백로 안에 피어야 결실이 좋고, 바람이 불면 벼가 여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추분 무렵에 벼를 수확하고 남부지방에서는 가을 보리를 심는다. 옛날에는 부인들이 삼베나 모시를 음력 8월이 가기 전에 다 짜두었다. 한로는 음력 9월의 절기로 양력 10월 8, 9일경이고, 상강은 음력 9월의 중기로 양력 10월 23, 24일경이다. 이 무렵은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제비는 따뜻한 강남으로 되돌아 가고 기러기가 날아오며 낙엽이 진다. 한로 무렵에는 콩, 팥, 조, 수수 그리고 벼 수확으로 바쁘다. 상강 무렵엔 서리나 눈이 내리기 전에 배추와 무를 뽑아야 얼지 않는다. 고추따기, 고구마, 깨 수확을 하고 마늘, 가을 보리 심기에도 바쁘다. 국화가 피어나고 단풍이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계절로 국화술, 국화전, 화채 등 계절음식도 만들어 먹는다.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은 음력 10월의 절기로 양력 11월 7, 8일경이고 소설은 음력 10월의 중기로 양력 11월 22일경이다. 이 무렵엔 물과 땅이 얼기 시작하고 눈이 내리며 말 그대로 겨울이 시작되는 때이다. 눈이 내리기 전에 밭작물을 뽑고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담그는 등 겨울준비를 한다. 김장 독을 땅 속에 묻어 보관하면 그 맛이 최고지만 요즘은 개량 김치독을 사용하거나 김치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기도 한다. 김장은 북쪽 지방부터 담그기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간다.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은 음력 11월의 절기로 양력 12월 8일경이고 일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지는 음력 11월의 중기로 양력 12월 22이다. 이 시기에 농촌은 비교적 한가한 시간을 맞게 된다. 옛날 농가에서는 밤에 짚으로 새끼, 가마니 등을 짜고 겨울 땔감을 마련했지만 요즘은 비닐 하우스에서 사계절 채소를 재배하며 제주도에서는 귤, 파인애플 등 열대과일을 재배한다. 또한 방한준비와 함께 씨앗과 곡식 저장, 퇴비, 농기구 정리, 양념류의 씨앗심기 등 다음해 농사의 준비를 한다. 동지에는 잡귀를 쫓는 의미로 붉은 팥죽을 만들어 먹는다. 소한은 음력 12월의 절기로 양력 1월 5일경이고,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은 음력 12월의 중기로 양력 21일경이다. 한국의 겨울은 보통 3한 4온으로 이 무렵의 날씨가 가장 춥다. 절기의 명칭으로는 대한이 소한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대한이 소한 집에 가서 얼어 죽었다.", "소한 추위는 꾸어다가라도 한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는 소한 때가 더 춥다. 이 시기는 큰 눈이 많이 내려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설경을 이루기도 한다.
한국인이 믿는 종교
한국인이 믿는 종교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온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외래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 수없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자, 곧 한국인의 삶의 원형이다. 특히 넓은 뿌리와 역사를 가진 민간신앙은 무속, 마을제사, 가정신앙, 점복, 주술 등으로 폭넓게 전승되었으며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불교문화, 조선 5백년의 유교, 근대 이후의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 안에도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잠복돼 있다.또 민간신앙은 외래종교의 조직이나 교리등과 융합하여 동학이나 증산교와 같은 자생종교로 성장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민간신앙 자체는 무속을 비롯한 판소리, 마을제사와 농악들 처럼 민속예술과 전통문화 보존의 뿌리를 이루어 왔다.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인간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무당은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 전달해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나 고갯마루에 수북히 쌓인 돌무더기로 그 옆에는 보통 신성시되는 나무나 장승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그 옆을 지나 다니면서 돌이나 나무 또는 오색의 천 등을 올려놓으면서 개인의 소원이나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 즉,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을 모시는 당(堂)이다. 그러나 집을 따로 짓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돌을 원뿔모양으로 쌓아 올리거나 그 옆에 서낭나무 또는 돌기둥이 서기도 하고 여기에 오색 천을 매단 새끼줄을 감기도 한다. 이 곳에 올려놓은 돌이나 나무, 천조각은 함부로 무너뜨리거나 자리를 옮겨 놓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어느 마을에나 서낭당을 중심으로 한 옛 이야기가 하나쯤은 있어서 한국 민간신앙의 특징인 신성시되면서도 사람들과 친근한 마을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장승은 마을의 입구나 길가에 세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을 위협하는 잡귀를 물리치고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며 때로는 개인적으로 소원을 기원하는 대상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또한 사찰의 입구나 지역간의 경계선에 서서 경계표와 이정표 등의 역할도 한다. 전체는 기둥의 형태로 윗부분에 사람의 얼굴 형태를 소박하게 새기고 아래부분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의 글씨를 새겨 남녀 한 쌍을 세운다. 왕방울 만한 눈은 부릅뜨고 코는 주먹코이며 귀까지 찢어진 입에는 송곳니를 드러낸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꾸밈없이 수수하고 자비로우며 친밀감을 주는 얼굴이 기도 하다. 이러한 장승은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신성시되어 함부로 만지거나 상하게 하면 벌을 받는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을 본 떠 만든 모형이나 그를 닮은 형태를 숭배하는 민간신앙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기신앙의 역사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바위에 새긴 성기를 노출한 남자 그림이나 신라시대의 토우(土偶)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에도 돌이나 나무, 도토기(陶土器) 등으로 성기 모형을 만들거나 성기와 유사한 암석이나 지형 등의 자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농사나 사냥, 고기잡이의 풍요가 절실하게 필요했으며, 또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은 성생활의 내면적 의의를 깨닫는데 도달하게 되어 성신앙을 사회적.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상징하는 성기를 숭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불교적인 성격을 띤 국가행사로 그 시작은 신라 진흥왕 때(551년)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등(燈)과 향(香)을 올리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특히 등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이로써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이래로 전국적으로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지던 연등회는 매우 화려하고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등회는 비록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다. 오늘날에도 부처님 오신날인 4월 초파일(음력 4월 8일)에 전국적으로 연등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각 절마다 불교신도들이 각기 자신의 등을 하나씩 들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시내에서는 각양각색의 연등을 들고 행진을 하기도 한다. 사월 초파일에 절에서 승려가 염주를 들고 부처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탑을 돌면 신도들이 등에 붉을 밝혀 들고 그 뒤를 따라 돌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으로 시작되었으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민속놀이의 하나로 변하였다.따라서 처음에는 불교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부처에 대한 칭송을 하다가 차츰 민요풍의 노래도 부르게 되고 개인의 소원을 빌게도 되었다. 또한 참여 인원도 늘어나서 큰 절에서는 수백 명이 참가하는 탑돌이의 장관을 볼 수 있다.탑을 도는 순서와 방향에 따라 10가지로 구분되는데 비록 민속놀이지만 불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매우 경건한 형태를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쇠퇴되었다가 1970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재연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석전은 원래는 산천(山川)이나 묘사(廟社) 또는 학교에서 선현(先賢)을 추모하기 위하여 올리던 의식인데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에서 올리는 의식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매년 봄(음력 2월)과 가을(음력 8월) 두 차례에 걸쳐 문묘(文廟)에서 석전을 올린다. 의식에서는 음식을 차리고 문묘제례악(文廟祭禮樂)을 연주하며 일무(佾舞)를 춘다. 의식의 순서는 물론 참여하는 인원, 음식의 종류와 놓는 방법, 연주하는 음악과 춤 등에 대하여 그 절차와 격식이 엄격하고 까다롭게 정해져 있으며 의식은 매우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1986년 11월 1일에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도 해마다 봄, 가을에 석전을 올린다. 한국에 카톨릭이 전래되면서 처음에는 종교이기보다는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차츰 많은 사람들이 서학(西學)에 심취하게 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주문모(周文謨)와 같은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었다. 1784년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회가 창설되었다. 많은 박해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어 정약용의 형제인 정약전.정약종과 같은 학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신도를 얻게 된다.이렇게 해서 발전한 천주교는 근대사회에 들어와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하였고, 오늘날은 거의 200만에 가까운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전도사업에 힘쓰고 있다. 한국 카톨릭의 발전은 1969년 서울대교구 교구장 김수환(金壽煥)이 추기경에 서입되는 결실을 가져왔으며 한국에 카톨릭이 전래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인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기념집회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한국에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것은 미국의 북장로교로,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Allen, H.N.)의 서울 도착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광혜원(廣惠院)을 열고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곧이어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Appenzeller,H.G.), 스크랜턴(Scranton,W.B.) 등이 도착하면서 이화학당 . 배재학당 등을 세워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에 들어가게 된다.초기 기독교회는 전통과의 이질성 때문에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활발한 반일운동을 계기로 민족교회로서 자리잡게 된다. 꾸준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으로 민중의 눈을 뜨게 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추진하는 가운데 교세를 확장하여 1984년에는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였다.현재는 세계 각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900만의 신도를 갖게 되었다. 이 사진은 영락교회로 1945년 한경직 목사에 의해 설립되어 각종 기독교선교운동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사업을 많이 전개하였고 현재는 약 6만 여명의 교인을 가지고 있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을 바탕으로 발전된 민족종교로 처음에는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혁하고자 시작한 단체였으나 일부 세력이 친일화하자 정치적 관심을 포기하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고 본격적인 종교로서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들에게 사회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결과 3.1만세운동 때에 중심역할을 담당하였고, 잡지를 발간하는 등 근대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계몽에 힘썼다. 천도교의 기본정신은 인즉천(人卽天)으로 이는 자기의 마음을 스스로 깨달으면 그 몸이 곧 하늘이고 그 마음이 곧 하늘이므로 하늘을 모시는 것은 자기를 모시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천도교의 중심교리는 하늘의 이치를 믿는 것이며 하늘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므로 결국 인간의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인간지상주의를 표방한다. 천도교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서 지상천국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여 윤리적 사회를 이룩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여 세계의 신앙을 하나로 통일할 것을 주장한다. 한국 자생종교의 하나로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출신의 박중빈(朴重彬, 호는 소태산(少太山))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교에 두고는 있으나 근본진리가 사상적으로 같을 뿐이고, 창교자인 소태산은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내세워 불교를 혁신하였다. 모든 존재를 서로 가능하게 하는 힘과 법칙은 '은(恩)'으로 유지되는 것이며 이를 깨닫고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이 원불교의 신앙이다. 또한 끊임없이 정신을 수양하면 원만하고 거짓 없는 본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그 마음을 활용하면 한없는 은혜와 위력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교리(敎理)는 원불교의 상징인 '○'으로 정리되었다. 여러 가지 공익사업을 행하는 가운데 건전한 종교로 성장한 원불교는 현재의 신도가 약 100만으로 추정되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일원세계'라는 표어를 내걸고 내적으로는 실력을 쌓고 외적으로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 힘써 일하는 종교로 발전하고 있다.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다크 투어리즘, 제주 4•3 치유 공간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또 제주야? 또 올레길을 걸어? 라는 친구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이미 여러 번을 걸은 올레 10코스(화순항~모슬포항)를 이번엔 역방향으로 걷기로 한다. 과거 모슬포항이 아니다. 새로운 여객터미널을 만들고 운진항이라고 개명하고 익숙한 모슬포항을 대신한다. 오늘의 걷기 목적은 이름도 생소한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떠나는 여행, 일명 역사교훈여행)의 생생한 현장, 설치 미술작품들을 둘러 보는 것이다. 지난 9월 2일 개막식을 갖고 12월 3일에 폐막한 제주비엔날레 총 다섯 전시 공간 중 하나인 알뜨르 비행장 전시장은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라 불리며 폐막 이후에도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공군 측이 3년간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주었다고 한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이 다크투어리즘의 성지가 되길 기원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는 동안 바다너머로 보이는 산방산의 풍경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초입 안내센터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만을 보고 제주 4·3사태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는다. 총 13명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14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알뜨르비행장을 제주비엔날레 전시장의 제 3코스로 만든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 평화로웠던 경작지에 일본군이 모슬포 주민을 강제동원해 조성한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사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그 옆 섯알오름에는 우리민족끼리의 아픔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있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 넋을 기리는 유적지가 있다. 예술가들은 군기지의 흔적인 격납고와 벙커가 남아 있는 아픔의 땅에 역사와 장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작품들을 전시한 것이다.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당시 격납고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경작지에서 주민들이 다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생활자체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메시지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사실 알뜨르비행장의 전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이번에도 참여하고 있는 박경훈작가의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가 열렸었다고 한다. 그 당시 제작된 박경훈·강문석 작가의 공동작품 '알뜨르의 제로센'이 격납고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제로센- 영어 표기인 제로(zero)와 센토키(전투기의 일본어 발음)의 첫 글자를 합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살공격(가미카제 · 神風)에 이용된 전투기로 유명하다) 그 앞에 모래자루를 활용한 옥정호의 '무지개 진지'가 설치되긴 했지만 일제 전투기를 철로 재현한 그 당시 작품의 재현이다. 강문석 작가는 날개 부러진 제로센 전투기를 형상화한 '기억'을 또다른 격납고에 설치해 놓았다. 알뜨르 문화예술공간 초입 안내센터 앞에는 격납고 전시장에 앞서 거대한 작품들이 압도하며 관람객을 맞는다. 구본주작가의 ‘갑오농민전쟁2’(1994, 브론즈)와 최평곤작가의 ‘파랑새’(2017, 대나무, 철) 그리고 김해곤작가의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등은 차음부터 관람객을 압도한다. 37세로 요절한 조각가 구본주는 형상미술과 리얼리즘을 근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성을 작업의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 노동자, 농민, 그리고 도시의 샐러리맨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며 현실 비판적 시각을 제시한 작가의 ‘갑오농민전쟁2’는 저항과 혁명의 에너지를 인체 조형의 솟구치는 힘으로 표현했다. 최평곤작가는 동학 농민군들이 사용했던 죽창에서 영감을 얻은 대나무를 씨줄 날줄로 엮어 '파랑새'를 설치했다. 9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이지만 긴 원통형으로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공간을 위협하지 않는다. ‘파랑새’는 알뜨르비행장의 풍경, 바람과 조우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김해곤, ‘한 알’(2017, 대나무, 천, 비계 구조물 ● 사진출처:제주 비엔날레) 1990년대 후반이래 깃발과 천을 활용한 환경미술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김해곤은 알뜨르비행장에 ‘한 알’을 심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황금색 천으로 이뤄진 대형 구 작품은 밀 한 알의 탄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알뜨르비행장이 지니고 있는 전쟁의 역사가 치유되고 이 곳에 새로운 한 알의 생명이 잉태되어 평화의 시작을 알린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임경섭, ‘두린아이’(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임경섭작가의 '두린아이'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다. 전망경을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는 섯알오름의 일출과 일몰 풍경에 과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 사진을 결합했다. 딥러닝 기술을 이용, 인공지능(AI)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제어하지 않고 오히려 확대시켜 얻어지는 이미지를 예술표현의 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딥드림'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딥러닝의 핵심인 '인간이 축적해온 데이터를 습득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한다'는 개념과 달리 오류 를 축적하는 것이다. ‘두린아이’라는 AI의 시선은 인류의 과오를 되새기게 한다. 최고팀, ‘숭고한 눈물’(2017, 삽, 시멘트, 우레탄 페인트, 가변크기) '숭고한 눈물' 이 작품도 공감이 갔다. 최고팀은 최창훈, 고윤식 작가로 이루어진 팀이다. 이 팀은 알뜨르비행장에서 이뤄진 강제노역의 아픔을 담아 이 작품을 설치한다.노동의 상징인 삽과 시멘트로 제작한 작품으로 삽머리 모양이 눈물 모양과 유사한 점에 착안, 그 형상으로 노역의 슬픔을 상징했다. 시멘트는 노동현장의 폐쇄성과 암울한 느낌을 표현한다. 전종철, ‘경계선 사이에서’(2017, 혼합재료, 가변크기) 전종철작가의 '경계선 사이에서'는 제주의 환경적, 역사적 흔적을 기본 컨셉으로 바람을 거슬러 머무는 것이 아닌 바람이 지나가는 철망 구조물을 씨줄과 날줄로 엮었다. 이는 억겁의 인간 세상사의 경계선을 획정하는 관계항의 알고리즘적인 이미지를 근거로 한 사유의 과정을 의미한다. 격납고 입구 철망에 걸려있는 돌 조각들은 바람, 시간, 흔적들에 의해 걸러지고 남은 역사 속의 편린을 상징한다. 격납고 실내에는 아름다운 꽃 밭을 조성해 기존 구조물의 척박함과 대비되는 삶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격납고 내부 바닥부터 철망 너머의 세상까지 자갈을 깔아 꿈과 희망을 품고 비상하는 활주로 이미지를 연출했다. 활주로 끝에는 폭격기 대신 푸른 색 의자를 설치해, 관객이 편히 앉아 철망 경계선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 풍경과 격납고 잔재를 동시에 보게 한다. IVAAIU, 자유 큐브, 2017, 나무 구조물, 가변크기 VAAIU작가는 이번에 두 개의 큐브작품. '자유큐브'를 전시했는데 그 중 하나이다. 직접 올라 알뜨르비행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 느낌이 남다르다. 건축과 도시공학, 사운드, 인터렉션을 기반으로 21세기 새로운 건축적 원형을 시도한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당시의 자유를 억압했다. 노출을 막기 위해 언덕 형태로 구축이 되었고 내부 공간은 지면 안으로 최대한 삽입되어 돌출을 최소화했다. 스스로의 정보를 감추는 형태의 구조를 취한 것이다. ‘자유 큐브’는 이러한 억압적 상징물의 반대 형태인 자유의 모뉴먼트 기능을 한다. 격납고의 존재 자체를 외부로 끌고 나올 수 있도록 상승적 축을 적용했고 여러가지 레벨로 배치된 큐브들은 사람들에게 관측, 휴식, 토론 등의 자유로운 액티비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다. 아래아 ‘•’ 전쟁의 역사 알뜨리의 아픔과 주검을 상징하는 제주 돌의 형상 작품이다. 하석홍작가는 십수년간 연구와 창작 가운데 태어난 실제돌이 아닌 돌을 통해 제주역사의 아픔 속에서 피어난 생명력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작가의 돌은 빛과 바람에 따라, 놓여있는 장소에 따라 색도 모양도 다르다. 문명의 시작이자 미래인 돌에 한재준의 씨알인 ‘하늘꼴 아래아(·)’와 ‘천지인 히읗(ㅎ)’을 형상화했다. 두 작가는 만물창조의 소리 아래아에 담긴 가치를 살려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고자 한다. 알뜨르전시장 바로 옆 나무데크길에는 섯알오름이 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높이 40m, 둘레 704m의 작은 오름으로 송악산 응회환 외륜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세 개의 알오름 중 하나로 셋알오름의 서편에 있다고 하여 서+알오름이라 부른 것이 사이시옷 현상을 거치면서 섯알오름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이 진정된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당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내무부 치안국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을 압살하던 예비검속법을 악용해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 344명을 예비검속, 관리해오다 주민 210명을 법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집단 학살해 암매장한 비극의 현장이다. 희생자 유족 가운데 한림지역 유족들은 세월이 흘러 1956년 3월 총살현장에서 비밀리에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61구의 시신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현재 한림읍 금악리 속칭 만벵디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백조일손지묘에도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百祖一孫之墓 - 백 할아버지 한 자손, 누군지 알 수 없는 섯알오름 학살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무덤) 백조일손지묘에 억울한 양민학살의 원혼들이 모셔져 있다. 섯알오름을 지나면 정면에 송악산이 압도적 장면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너무 유명한 장소이니 생략을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먹거리장터인 ‘요망진식당’을 찾아 나선다. 미리 알지 못하면 그냥 지나칠 조금은 쌩뚱맞은 밭 중간에 덜렁있다. 한번쯤 들려 맛보면 좋을 식당이다. 제주에서 '요망지다'고 하면 '똑 소리 난다'는 뜻이다. 똑똑하고 야무지고 딱 부러진 식당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친절한 주인부부 내외가 손님을 맞는데 제주 명물인 돔베고기와 생선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을 먹음직스럽게 준다. 가격은 제주의 음식 기본값인 7,000원이다.(평일에는 제주사람들이 기름기가 많아 싫어한다는 옥돔대신에 고등어를 주고 주말에만 관광객용으로 옥돔을 준다) 제주 올레 10코스에 위치한 알뜨르비행장 전시장은 삼년간 유지를 한다고 하니 길만 걷는 올레꾼들처럼 그냥 지나치지 말고 비행장 격납고를 찾아(벌판 경작지를 살펴보면 격납고를 쉽게 볼 수 있다. 그 안에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설명이 쓰여 있다) 꼭 둘러보길 권한다.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 만경대(萬景臺)? 망경대(望景臺)?
설악산에만 만경대가 세 곳이나 있다. 첫째는 속초시의 외설악지구에 있는 만경대로 천불동계곡과 공룡능선 등을 조망 할 수 있고, 둘째는 인제군 내설악지구에의 오세암 바로 앞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나한봉 등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마지막 셋째는 46년만에 개방된 남설악의 흘림골과 주전골 사이의 만물상을 조망 할 수 있는 만경대 등이다. 망경대는 절벽 정상에는 옛날 주전골의 가짜 돈을 만들던 곳을 감시하던 초소인 망대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망경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만경대라는 이름은 서울 북한산과 경기 포천 운악산, 전주 남고산성 등에도 있다. 설악산국립공원 측에 따르면 지난 2001년 공원 계획을 세우면서 썼던 망경대라는 이름을 고수하려고 했지만 양양문화원이 이의를 제기했다. 지난 1976년 양양문화원이 발간한 향토지, 1968년과 1990년 양양군이 발간한 향토지와 양주지, 2010년 양양군지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양양군지에 모두 만경대라는 명칭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 학자 이곡(1298~1351)의 동유기 가정집(東遊記 稼亭集)과 조선 시대 학자 김창흡(1653~1722)의 설악일기(雪嶽日記)에도 만경대하고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는 만경대가 정식 탐방로로 개설되면서 임시 개설 당시 '망경대'로 표기한 안내판 등을 모두 '만경대'로 바꾸었다.
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청렴결백하고 지조를 중시하는 사람,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한 정신, 세속에 물들지 않고 늘 학문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선비라고 한다. 그런 선비의 방은 비록 문갑과 서안, 책장, 글씨로 된 병풍이 고작이지만 그 분위기에서는 선비의 높은 지조와 정신이 엿보인다. 한국의 학자들 가운데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을 선비정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선비정신은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중히 여기는 도덕적 인간의 정신을 말한다. 이는 조선조의 지도이념인 유교에 입각한 지배계층의 생활신조로서 말하자면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이상적인 문화유형의 하나다. 인격이 높은 선비일수록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도학(道學)과 덕행을 쌓는 것으로 본분을 삼았다. <선비는 민족원기의 기탁(寄托)이며, 국가명맥의 최후 보루이다>, <선비의 치욕은 국가의 치욕이다>라고 할 만큼 당시 선비의 위상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드높은 경지를 이루며, 학문의 연원이 되어 이 시대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다. 도학 군자로 일컬어지는 이퇴계, 이율곡을 비롯하여, 산림유(山林儒)의 표상이 돼온 남명 조 식 등의 지고한 선비 정신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관으로 한국 사상과 철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였다. 지필묵연(紙筆墨硯) 문방으로 사용되던 사랑방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던 도구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의 필기구이다. 이 네가지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서로 떨어져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비들은 금구슬이 앞에 있을지라도 흙처럼 여기는 청렴함을 자랑으로 삼지만 문방사우를 탐내는 욕심만큼은 '선비의 벽(癖,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병증)'으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이들 문방사우는 서로의 벗일 뿐 아니라 선비에게도 벗이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내내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공부를 통해 귀결(歸結)되는 그들의 글정신을 나타내어 알리게도 하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호, 경북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先賢)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도 담당하였다. 서원에서는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을 교육하는 동시에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처음으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서원은 1542년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白雲洞) 서원으로 고려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1550년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서(額書, 사액사원의 줄임말,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노미, 토지 등을 하사한 서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뒤에는 몇백년 묵은 소나무숲이 울타리를 치고 있고 앞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흘러 맑고 밝고 조용한 학문을 연마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군 도산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본디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세운 서당이었으나 스승이 타계한 후 그의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다. 옛날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고자 선망하던 곳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마당에는 과거의 선비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퇴계가 아끼던 살구나무가 우거져 있다. 경내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손수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서 퇴계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의 기거를 위해서는 용운정사(龍雲精舍)를 지었다. 이 건물은 '工'字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공부를 하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창문 등 가옥의 구조가 앉아서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선비의 공부는 책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학생과 스승은 함께 먹고 자면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도리까지도 연마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도산서원이라는 편액(扁額)은 당대의 최고 명필이던 석봉 한호(石峯 韓護)가 쓴 것이 전해지고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그가 저술한 책 모두를 일컬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고 하는데, 총 500여권에 달하는 이 책들은 철학,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그의 유배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유배라는 난관을 오히려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에 임하여서나 혹은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끝없이 연마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위치나 지위에 상관없이 고고한 선비의 정신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저술의 대부분을 썼던 다산초당(茶山草堂) 역시 한 채의 작은 집에 불과하지만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증거로 우리에게 남달리 다가오는 것이다. 전주향교(全州鄕校)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상징적인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정치구조의 내용을 기층사회에까지 침투시키려 설립한 향교는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 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유학교육의 성과를 과거제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어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향교의 구성은 서울의 성균관을 닮아 선현을 배향하는 공간과 학생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배향공간이 우위에 있다. 전주향교도 이러한 향교 중의 하나로 고려말에 세워졌으며 총 99칸의 대규모 건물로 되어 있어서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향교의 설립취지에서 우리는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추구하던 선비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성균관(成均館)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의 뒤를 잇는 조선시대의 유학교육기관으로 인재양성을 위한 국립대학과 같은 유학교육기관이다. 성균관에의 입학에는 자격제한이 있어서 대체로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주자학정신을 배우며 동시에 성현을 섬김으로써 이론과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성현을 모시는 공간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숙소인 동/서재(東/西齋) 등과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 기단이나 건축양식 등이 이들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유교의 교육과 성현을 모시는 것은 성균관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도 이어져 이러한 교육체계는 조선의 선비를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추구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퇴계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의 학자로서의 인품은 초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공적인 도리와 개인의 이익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조리의 사회였기 때문에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구별을 뚜렷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정치현실에서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둔하고자 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관직이 권해졌고, 관직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한 끝에 결국 영원한 은둔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에서 벗어난 외직을 지망하였다. 그 후로도 번번히 관직을 사양하였고 69세가 되자 결국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과 낙향을 번갈아 하던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