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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6년(676) 2월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대룡(大龍)과 부석(浮石)으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의상대사의 구도심(求道心)을 지켰던 선묘(善妙)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어 더욱 숭고한 종교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량수전 뒤에 있는 부석과 이 절이 개수(改修)될 때 무량수전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거대한 석룡(石龍)에 의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조사당(국보 19), 소조 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과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67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화엄사는 지리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창건 이래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어 황룡사의 승려 연기(煙氣 또는 緣起)가 신라 경덕왕 때 세웠음이 밝혀졌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중층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웅장한 규모이다.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다포의 복잡한 공포(貢包)가 중층의 팔작지붕 처마 밑에 꽉 차 있어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기다란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어서 웅장한 건물의 규모와 함께 각황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보물 제144호, 남북 15.8, 동서 10.1m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던 자장(慈藏)의 감명깊은 자기헌신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 절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가람배치는 이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앞에는 불사리에 참배할 수 있도록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지어진 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때의 건물양식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연화문 축대와 계석(階石) 문양이 남아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T자로 북쪽만 제외하고 합각(合閣, 용마루)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T자이고 법당의 평면은 방형이며, 뒷벽은 금강계단에 예불하기 위하여 벽으로 막지 않고 문을 달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놓았다. 또한 천정은 국화와 모란이 조각된 꽃천정으로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법당의 운치를 높여준다. 국보 제15호,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는 682년 의상(義湘)이 세운 사찰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내려 앉은 자리에 세웠다거나 또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른 의상을 청마(靑馬)가 안내하여 이곳에 앉았기 때문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중.후기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양 옆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다른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여겨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上樑文)에 1363년 건물의 지붕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인 조계산(曹溪山, 또는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함)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변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깊게 이어지고 수많은 계곡과 하천,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들이 있어서 명찰(名刹)과 더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을 당시에는 승려 30-40명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사(定慧社)가 이곳에 옮겨와 정착한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면서는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는 등 대찰(大刹)로 발전하였다.송광사에는 하사당(下舍堂, 보물 263호)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선객(禪客)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종의 승방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부엌의 기능을 고려하여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이는 용마루를 뚫어 환기구멍을 설치한 것으로 이러한 설비는 송광사 주변의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42), 『고종제서(高宗制書)』(국보 43)의 국보와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외의 수많은 보물이 있어서 명실공히 대찰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초가집과 기와집, 돌담과 흙담, 아기자기한 산과 시냇물,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서낭당, 사당, 향교 등등. 정적하고 단조한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 마을의 정황이다. 자연 경관을 중요시 했던 우리 민족의 주거 형태는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이처럼 조화와 균형 속에 배치되었다.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주거 문화는 선사시대의 움막과 원두막과 같은 생나무 집에서 출발하여 수혈 주거, 귀틀집, 초가, 기와집의 형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기원 전 4세기 경 농업 생활의 정착과 함께 우리의 고유한 난방장치인 온돌이 발명되면서 부터 초가집과 기와집이 일반화 되었으며, 기후와 생활 양식에 따라 홑집과 겹집,양통집, 곱은자 집 등의 다양한 형태가 생겨났다. 이처럼 집의 형태나 크기가 달라지면서 주거 생활의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곡물 저장과 가축 사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남녀의 활동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하기도 했다. [양반가] 보물 제414호,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양반가옥은 대체로 짙은 회색의 기와를 얹고 벽에는 흰색을 칠하며 이와 고동색의 나무색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왕궁이나 사찰에 있는 단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운데 이는 금지 이전에 꾸미지 않는다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건물들은 여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건물마다 고유의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안채, 남자와 그의 손님을 위한 사랑채, 그리고 하인을 위한 행랑채 등이 벽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직선으로 설계된 경계선 안에 질서있게 배열되어 전체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단정한 구성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대문을 다시 통해야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쪽에는 담장을 따로 쌓아 사당을 마련하였다.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낙안읍성 초가는 한국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이엉으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털털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이러한 초가가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선이 우리네 나직한 산등성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집의 울타리도 지붕을 닮아 각이 지거나 선이 곧은 것이 별로 없고 다만 땅이 생긴 모양대로 경계를 긋고 낮은 돌담을 울퉁불퉁 쌓거나 혹은 가는 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것이 전부이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벽으로 단순 소박하며, 방도 큰방/작은방/부엌과 헛간이 서로 붙어 'ㅡ'자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은 'ㄱ'자도 볼 수 있다. 그림은 전남 낙안의 벌교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한국 전통 초가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민속자료 33호,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김진호 집 너와집은 나무판이나 청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른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산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지역과 평안도 산간지역, 강원도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화전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적송이나 전나무 등을 가로 20-30cm, 세로 40-60cm, 두께 4-5cm 정도로 켜서 서로 포개어 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 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이 되게 눌러 놓기도 한다. 너와와 너와의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서 환기도 잘되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며, 단열효과도 커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하다. 그림은 대표적인 너와집으로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의 집으로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너와집은 산림보호책,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사적 제267호,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서울 한강변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대부분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에 속한다. 주거의 형태는 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수혈주거로 원형에 가까운 말각(抹角) 방형의 바닥을 마련하고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둘레에는 기둥을 세워 원뿔형의 지붕을 얹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식 주거형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원두막과 같은 형태이다.내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고, 간혹 저장구덩이가 있기도 하며,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뚜렷하다. 좁은 입구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바람을 막고 햇빛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다양하나 대체로 4-5인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당시의 가족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기와 화살촉, 그물추, 뼈바늘 등이 있는데 문 가까이에서는 화살촉 등 남성용구가 주로 발견되는 반면 문에서 가장 먼 곳에는 화덕이 있으며 그 근처에서 뼈바늘, 토기 등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거지 내에서 위치에 따라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육지 속의 섬, 문향의 마을, 고은(古隱) – 경상북도 영양
육지 속의 섬, 문향의 마을, 고은(古隱) – 경상북도 영양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청송군, 봉화군과 더불어 경상북도 북부 오지 중 하나로 영양고추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의 옛이름이 고은(古隱)이다. 옛고, 은둔할 은자의 뜻으로 이곳은 유배를 보내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비들이 많이 나오고 이곳 출신 문인들도 많아 문향(文郷)의 마을로도 불린다. 조지훈선생의 주실마을, 오일도선생의 감천마을, 이문열선생의 두들마을이 모두 영양에 있다. 신라 초에 고은(古隱)이라 불리었는데 ‘고은’은 ‘곱다’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과 ‘고은’ ‘곱’에 ‘은’이 붙어 만들어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고은’이 ‘굽다’라는 의견은 영양을 감돌아 흐르는 ‘감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자 땅이름으로 ‘반변천’(半邊川)·곡강(曲江)이라 부르는 이 강을 달리 ‘감내·감들내’라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금장산·백암산·명동산·일월산 등의 산과 장군천·장파천·반변천 등의 하천이 굽이져 만나는 곳이다.(허재영교수 의견) 조지훈선생의 주실마을, 영양군 홈페이지 발췌 영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고추이다. 매년 김장때면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영양고추축제를 열고 있다. 영양의 대표 관광지 몇 곳을 소개한다. 두들마을/음식 디미방 영양군청 주도로, 석보면 두들마을(이문열의 고향)등 문인의 고향 4곳에서 답사 프로그램 ‘소풍’을 선보였는데, 두들마을 답사는 석천서당과 정부인 안동 장씨 예절관 등으로 이어진다. 전통한옥체험관에서 음식디미방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선바위와 남이포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선바위와 남이포는 '영양고추'와 같이 영양의 상징과 같은 곳이다. 선바위 관광지에서 다리를 건너 절벽 밑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면 ‘남이정’이란 정자가 나온다. 강 건너 절벽에 촛대처럼 하늘로 치솟은 바위가 선바위다. 남이포는 조선시대 남이 장군이 모반세력을 평정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이외에도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지훈문학관, 수하계곡, 측백수림, 서석지와 연당마을, 두메송하마을, 영양고추홍보관, 용화리삼층석탑, 삼의계곡, 일월산과 자생화공원, 반딧불이천문대 및 생태공원 등이 있다. 선바위 서석지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의/식/주] 직물/염색: 한국 옛 사람들의 옷 만들기
길쌈은 복식생활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의 대표적인 일거리 중 하나였으며 이미 상고 시대 부터 길쌈 풍속이 전해올 정도로 그 역사 또한 오래다. 조선시대에는 삼베, 모시, 무명, 명주 등의 길쌈이 전국적으로 성행해 복식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에 따라 조선조에는 길쌈에 대한 풍속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조선시대 때 삼베길쌈은 질적인 면에 상당한 발전을 보였으며 지방에 따라 북포, 강포, 안동포, 돌실나이 등 다양하게 발달했다. 모시길쌈은 순백색으로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짜는 한산모시가 유명하며 모시는 삼베나 무명과 마찬가지로 길쌈은 대개 재배와 수확, 씨앗기,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짜기 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양반가나 계급 사회에서 주로 입혀지던 명주는 삼한시대 부터 길쌈의 기록이 나타나며 그 과정은 누에치기, 실뽑기, 실내리기, 명주짜기 등으로 이어진다. 요즘에도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의해 그 길쌈의 풍속이 전수되고 있으며 사진은 고인이 된 옛 인간문화재 할머니가 안동포를 짜고 있는 모습이다. 유달리 백색을 선호한 민족이면서도 한복에 적용된 색상을 보면 그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우리 복식의 아름다움은 먼저 오행에 기초한 전통색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대비적인 색채 사용으로는 흑백의 조화와 더불어 보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염직은 삼국시대 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발달을 보이고 있으며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오면 양반계층을 대상으로 염색이 발전되고 있다. 물들이는 횟수에 따라 연한색 부터 짙은 색 까지 다양한 색상을 내는 청색의 쪽물을 비롯하여, 홍색에는 소목, 분홍색은 홍화, 황색은 치자 등 주로 식물염료를 사용한다. 식물에는 뿌리, 나무껍질, 꽃, 열매 등 특정 부위에 색소를 함유하고 있어 그 부분을 채취하여 직물의 재료나 매염제, 염색 방법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내는데 홍화는 꽃으로, 치자는 열매로 물들인다. 바느질은 옛 여인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의 하나로 길쌈과 더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바느질 한 땀에도 여인들의 정성과 사랑과 염원이 깃들어 있었고 바느질에 소용되는 용구 또한 정성스럽고 귀중하게 간직해 왔다. 아름다운 색색의 종이를 발라 만든 바느질 상자 안에는 보통 실, 자, 가위 등 재봉용구를 비롯하여 실패, 바늘집, 바늘꽂이, 골무 등이 가지런하게 챙겨져 있다. 특히 바느질 도구에 딸리는 골무나 바늘집 같은 작은 용구 하나에도 정성을 다해 수를 놓은 여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가운데 원형의 바늘집을 중심으로 여기에 다양한 모양을 연결한 이 바늘꽂이는 옛 여인들의 재치와 미의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보기가 된다. 옷을 만들고 남은 명주들을 모아 두었다가 하트모양 등 여러개의 귀엽고 앙증스러운 형태들을 만들어 꼼꼼히 수를 놓은 이 바늘꽂이는 조형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다.
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청렴결백하고 지조를 중시하는 사람,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한 정신, 세속에 물들지 않고 늘 학문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선비라고 한다. 그런 선비의 방은 비록 문갑과 서안, 책장, 글씨로 된 병풍이 고작이지만 그 분위기에서는 선비의 높은 지조와 정신이 엿보인다. 한국의 학자들 가운데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을 선비정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선비정신은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중히 여기는 도덕적 인간의 정신을 말한다. 이는 조선조의 지도이념인 유교에 입각한 지배계층의 생활신조로서 말하자면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이상적인 문화유형의 하나다. 인격이 높은 선비일수록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도학(道學)과 덕행을 쌓는 것으로 본분을 삼았다. <선비는 민족원기의 기탁(寄托)이며, 국가명맥의 최후 보루이다>, <선비의 치욕은 국가의 치욕이다>라고 할 만큼 당시 선비의 위상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드높은 경지를 이루며, 학문의 연원이 되어 이 시대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다. 도학 군자로 일컬어지는 이퇴계, 이율곡을 비롯하여, 산림유(山林儒)의 표상이 돼온 남명 조 식 등의 지고한 선비 정신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관으로 한국 사상과 철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였다. 지필묵연(紙筆墨硯) 문방으로 사용되던 사랑방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던 도구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의 필기구이다. 이 네가지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서로 떨어져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비들은 금구슬이 앞에 있을지라도 흙처럼 여기는 청렴함을 자랑으로 삼지만 문방사우를 탐내는 욕심만큼은 '선비의 벽(癖,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병증)'으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이들 문방사우는 서로의 벗일 뿐 아니라 선비에게도 벗이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내내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공부를 통해 귀결(歸結)되는 그들의 글정신을 나타내어 알리게도 하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호, 경북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先賢)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도 담당하였다. 서원에서는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을 교육하는 동시에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처음으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서원은 1542년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白雲洞) 서원으로 고려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1550년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서(額書, 사액사원의 줄임말,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노미, 토지 등을 하사한 서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뒤에는 몇백년 묵은 소나무숲이 울타리를 치고 있고 앞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흘러 맑고 밝고 조용한 학문을 연마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군 도산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본디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세운 서당이었으나 스승이 타계한 후 그의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다. 옛날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고자 선망하던 곳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마당에는 과거의 선비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퇴계가 아끼던 살구나무가 우거져 있다. 경내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손수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서 퇴계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의 기거를 위해서는 용운정사(龍雲精舍)를 지었다. 이 건물은 '工'字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공부를 하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창문 등 가옥의 구조가 앉아서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선비의 공부는 책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학생과 스승은 함께 먹고 자면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도리까지도 연마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도산서원이라는 편액(扁額)은 당대의 최고 명필이던 석봉 한호(石峯 韓護)가 쓴 것이 전해지고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그가 저술한 책 모두를 일컬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고 하는데, 총 500여권에 달하는 이 책들은 철학,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그의 유배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유배라는 난관을 오히려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에 임하여서나 혹은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끝없이 연마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위치나 지위에 상관없이 고고한 선비의 정신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저술의 대부분을 썼던 다산초당(茶山草堂) 역시 한 채의 작은 집에 불과하지만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증거로 우리에게 남달리 다가오는 것이다. 전주향교(全州鄕校)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상징적인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정치구조의 내용을 기층사회에까지 침투시키려 설립한 향교는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 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유학교육의 성과를 과거제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어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향교의 구성은 서울의 성균관을 닮아 선현을 배향하는 공간과 학생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배향공간이 우위에 있다. 전주향교도 이러한 향교 중의 하나로 고려말에 세워졌으며 총 99칸의 대규모 건물로 되어 있어서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향교의 설립취지에서 우리는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추구하던 선비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성균관(成均館)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의 뒤를 잇는 조선시대의 유학교육기관으로 인재양성을 위한 국립대학과 같은 유학교육기관이다. 성균관에의 입학에는 자격제한이 있어서 대체로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주자학정신을 배우며 동시에 성현을 섬김으로써 이론과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성현을 모시는 공간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숙소인 동/서재(東/西齋) 등과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 기단이나 건축양식 등이 이들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유교의 교육과 성현을 모시는 것은 성균관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도 이어져 이러한 교육체계는 조선의 선비를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추구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퇴계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의 학자로서의 인품은 초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공적인 도리와 개인의 이익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조리의 사회였기 때문에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구별을 뚜렷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정치현실에서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둔하고자 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관직이 권해졌고, 관직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한 끝에 결국 영원한 은둔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에서 벗어난 외직을 지망하였다. 그 후로도 번번히 관직을 사양하였고 69세가 되자 결국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과 낙향을 번갈아 하던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