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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악기
한국의 현악기
아쟁 줄의 수효는 7줄로 되어 있고 활로 연주하는데 다른 현악기의 활은 말총으로 만들지만 아쟁의 활은 개나리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진을 칠하여 만드는 점이 특이하다. 말총으로 만든 활에서 얻는 소리보다 다소 거친 듯 하나 음색이 장엄하다. 고려 때에는 당악에만 편성되었고, 조선 초기 이후로는 당악과 향악에 함께 사용하였다. 국악기 가운데서는 저음 악기에 들기 때문에 대편성의 관현 합주에 빼놓을 수 없는 귀한 악기이다. 해금 해금은 그 음색이 깡깡하기 때문에 속칭 깡깡이라고도 한다. 이 악기는 고려 이후로 관현 합주나 관악 합주 및 무용 반주에 중추적인 구실을 해왔으며 연주할 때 두 줄 사이에 활을 끼어 줄을 문질러 연주한다. ‘악학궤범’시절에는 줄을 당기지 않고 연주하였으나, 이후에 줄을 당겨 연주하게 되었다. 줄을 안 당겼을 때는 주법이 담담했는데 줄을 당겨 연주함으써 농현 등이 자유로워지고 표현력이 다양해 졌다. 거문고 고구려에서 발생한 6줄로 된 현악기이다. 활을 쓰지 않는 대부분의 현악기는 대개 손가락으로 퉁기거나 뜯어서 타는데 반해 거문고만이 술대를 사용해서 타는 악기이다. 예전에는 무릎 위 에 올려 놓고 가볍게 줄을 눌러 탔지만, 선조 5년(1572년) 금합자보 이후로는 줄을 밀어 타는 주법으로 발전하였다. 고구려 고분인 안악고분 제3호실 동쪽 벽 무악도에 거문고 원형이 보이며, 이것이 신라로 전해져 통일 이후에 널리 민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거문고는 백악지장이라 하여 선비의 높은 기상을 나타내는 현묘한 악기로서 숭상되어 왔다. 가야금 가야금은 한문으로 표기하는 말이고 가얏고가 원래의 이름이다. 신라 통일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아도 그렇고 가얏고라는 이름도 가야국의 나라 이름과 현악기의 옛말인 '고'의 합성어인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더욱이 경주 황남동에서 발굴된 신라시대 토기 장경호의 목 부분에 가야금을 타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확실해졌다. 신라 진흥왕 때의 가얏고 명인에는 우륵이 있었다.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6년(676) 2월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대룡(大龍)과 부석(浮石)으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의상대사의 구도심(求道心)을 지켰던 선묘(善妙)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어 더욱 숭고한 종교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량수전 뒤에 있는 부석과 이 절이 개수(改修)될 때 무량수전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거대한 석룡(石龍)에 의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조사당(국보 19), 소조 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과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67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화엄사는 지리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창건 이래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어 황룡사의 승려 연기(煙氣 또는 緣起)가 신라 경덕왕 때 세웠음이 밝혀졌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중층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웅장한 규모이다.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다포의 복잡한 공포(貢包)가 중층의 팔작지붕 처마 밑에 꽉 차 있어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기다란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어서 웅장한 건물의 규모와 함께 각황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보물 제144호, 남북 15.8, 동서 10.1m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던 자장(慈藏)의 감명깊은 자기헌신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 절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가람배치는 이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앞에는 불사리에 참배할 수 있도록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지어진 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때의 건물양식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연화문 축대와 계석(階石) 문양이 남아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T자로 북쪽만 제외하고 합각(合閣, 용마루)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T자이고 법당의 평면은 방형이며, 뒷벽은 금강계단에 예불하기 위하여 벽으로 막지 않고 문을 달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놓았다. 또한 천정은 국화와 모란이 조각된 꽃천정으로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법당의 운치를 높여준다. 국보 제15호,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는 682년 의상(義湘)이 세운 사찰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내려 앉은 자리에 세웠다거나 또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른 의상을 청마(靑馬)가 안내하여 이곳에 앉았기 때문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중.후기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양 옆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다른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여겨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上樑文)에 1363년 건물의 지붕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인 조계산(曹溪山, 또는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함)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변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깊게 이어지고 수많은 계곡과 하천,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들이 있어서 명찰(名刹)과 더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을 당시에는 승려 30-40명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사(定慧社)가 이곳에 옮겨와 정착한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면서는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는 등 대찰(大刹)로 발전하였다.송광사에는 하사당(下舍堂, 보물 263호)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선객(禪客)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종의 승방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부엌의 기능을 고려하여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이는 용마루를 뚫어 환기구멍을 설치한 것으로 이러한 설비는 송광사 주변의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42), 『고종제서(高宗制書)』(국보 43)의 국보와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외의 수많은 보물이 있어서 명실공히 대찰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60만 번의 손길이 만들어 낸 화문석
60만 번의 손길이 만들어 낸 화문석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강화 화문석장 60만 번의 손길이 필요한 명품중의 명품- 화문석 [花紋席] 꽃의 모양을 놓아 짠 돗자리.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의 특산품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했으며 장흥고(長興庫)에서 수요를 담당했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등의 문헌에 의하면 옛날의 고급스런 화문석은 용수초(龍鬚草)로 만들었으며 문양에 따라 황화석(黃花席) · 잡채화석(雜彩花席) · 오조룡석(五爪龍席) · 국화석(菊花席) · 오채룡문석(五彩龍紋席) 등으로 불렸다. 강화화문석장-전경 강화화문석장-개장 전. 시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푼이라도... 강화화문석장 강화화문석-문양 이 정도면 좋은 가격인데...강화화문석장 제작방법은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莞草) 화문석을 직조하는 노경소직법(露經疎織法)과 등메를 제작하는 은경밀직법(隱經密織法)으로 크게 나뉜다. 먼저 사초과에 딸린 1년생 풀인 왕골(완초)을 거두어들여 찬이슬을 맞혀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리는데,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이다. 다음에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화문석 제작시에는 염색한 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나간다. 세 사람이 너비 6, 7자의 화문석 1장을 짜는 데는 5일쯤 걸린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문양으로는 용(龍) 문양, 호(虎) 문양, 원앙과 봉황 문양, 학(鶴) 문양, 매화 문양, 모란 문양, 문자 문양 등이 있고 근래에는 주로 거북 · 사슴 · 학 등 장생동물과 수복강녕(壽福康寧) · 만수무강(萬壽無疆) · 구름 · 소나무 등이 도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