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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20세기의 디바들 '이난영, 마리아 칼라스, 에디트 피아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늘씬한 체구에 선명한 이목구비와 드라마틱한 멋진 노래. 그녀는 경제적으로 든든한 스폰서 '메네기니'와 결혼하며 최고의 스타로 오르게 되고 돈과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오페라 공연에서 그녀를 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선박 왕 '오나시스'였다. 그는 칼라스와 메네기니 부부를 자신의 유람선에 초청해 3주간 항해를 했는데 거기서 부적절한 애정사건이 발생한다. 유부남과 유부녀의 사랑. 칼라스는 수 십 명의 기자들을 모아 놓고 이혼을 발표하고 또한 당시로는 최고의 화제가 될만한 오나시스와의 동거를 시작하면서 결혼을 발표하려 했는데 얼마 안되는 짧 은 시간속에 세기적인 ‘운명의 장난’이 동시에 진행된다. 마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이후 미망인 '재클린 캐네디'와 전격적으로 결혼을 발표하는 오나시스. 이렇게 사랑게임은 허무하게 끝난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했던가? 이로부터 남은 생애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파리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심장쇼크사 한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간 마리아 칼라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오페라 음반 베스트 20 가운데 13편에 자신의 목소리를 담았지만 결국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조선왕조 궁중음식(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의 혼과 맥을 잇다, 황혜성장인
(사진:덕담 박승우) 조선왕조 궁중음식의 혼을 되살려낸 황혜성선생.평생을 바쳐 궁중음식의 전통과 맥을 이어온 장인이다. 황혜성(黃慧性 본관은 평해 1920.7.5~2006.12.14)선생은 1920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황선생은 처음부터 궁중음식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충청도에서 유일한 여성고등교육기관이었던 공주고녀를 나온 후 일본으로 유학해 후쿠오카시 지쿠시 여자고등학교(筑紫高等女学校, 현재의 지쿠시 여학원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이후 어머니의 배려로 교토여자전문학교(京都女子専門学校, 현재의 교토 여자 대학)의 가사과에서 일본 음식과 서구식 영양학을 공부했다. 5년간의 일본유학을 끝낸 후 귀국하여 2년간 대동고녀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서울의 숙명여전에서 가사과 전임강사 자리를 제의해 1941년 숙명여전에서 영양학을 강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숙명여전 학장이었던 오다(小田)씨의 제안으로 궁중음식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일제치하였지만 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궁인들과 거주하고 있어 아직 궁중의 법도가 남아 있던 창덕궁 낙선재로 찾아가 윤씨가 가장 아꼈다는 주방상궁, 한희순상궁을 찾아가 1972년까지 30년간 궁중음식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1970년 황혜성(왼쪽 첫번째)과 한희순(왼쪽 두번째) 등 윤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궁인들(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한상궁은 고종에 이어 순종, 순종비 윤황후를 모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주방상궁으로 임금이 평소에 드시던 수라상부터 잔치음식, 제사음식까지 모든 궁중음식 조리법을 섭렵한 분이었다. 황선생은 상궁마마님이라 부르며 궁중음식의 재료부터 꾸밈새, 간 맞춤, 관련 용어 등 전 과정을 수기로 공책에 기록했다. 한희순 상궁의 제자, 황혜성에 관한 신문기사 (1968년 3월 5일)(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그런데 그 가르침이란 것이 체계적이지도, 글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눈동냥으로 익히는 것이어서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당시는 대부분 상궁들의 기억을 통해서만 요리법이 전수되었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으로 음식에 대한 생활사의 보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때인데 황선생은 이 때부터 왕실 음식의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정형화, 규범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황혜성 친필노트(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그 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서각과 규장각 등을 돌아다니며 궁중음식에 관한 옛 기록들을 찾아내 손수 체계화시켜 간다. 그래서 탄생한 궁중요리 이론서 책이 1957년 발간된 ‘이조궁정요리통고’이다. 이조궁정요리통고는 구중궁궐 깊숙이 숨겨져 있던 궁중음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한국 음식 문화역사에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의 발간은 우리 요리가 학문의 한 분야로, 한국 음식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황선생은 생전에 "궁중음식은 한국 식문화의 정수"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두었다. 이조궁정요리통고(사진: 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1971년 드디어 궁중음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 38호로 지정 받게 된다. 황선생이 1943년 처음 기록하기 시작한 지 근 30년간의 혼신의 노력을 한 결과이다. 궁중음식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자 궁중음식의 전승과 보존, 그리고 전수를 위해 황선생은 1971년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다. 긍중음식연구원(전경) (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궁중음식연구원은 창립 25년을 맞아 1996년 처음 궁중음식을 전수받았던 낙선재와, 한상궁의 사저가 안동 별궁과 가까운 곳인 창덕궁 옆 종로구 원서동 한옥으로 이전해 궁중음식 전수 교육과 전시 등 활발한 활동한다. 윤황후가 거처했던 창덕궁 낙선재에 복원된 조선왕조 수라상(2014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원행을묘정리의궤(1795)에 기록된혜경궁 홍씨의 회갑상차림 재현모습 (2017년)(사진:재단법인 궁중음식문화재단} 황선생은 1972년 문화재관리국 식생할 분야 문화재 전문위원을 하며 궁중음식을 계량화하고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또한 후학 양성을 위해 교수로도 재직하며 관련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해 궁중음식 문화에 대한 학문적 노력에도 힘을 쏟았다. 또한 미국, 일본, 프랑스, 필리핀, 대만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궁중음식을 전시하고 강습해 우리 음식문화를 세계에 전파하는데도 노력한다. 황선생은 대중매체를 통한 한국 궁중요리 전도사로 친숙한 분이기도 하다. “집념을 가지고 발로 뛰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꾸준히 기록해 두어라”, “음식은 생명에 대한 존중이다” 라고 강조한 황혜성선생. 그의 손길에서 사라진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영원한 한국의 위대한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상궁에서 황선생으로 계보를 이어가던 무형문화재 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문화는 안타깝게도 2006년 12월 14일 오후 12시30분 서울의료원에서 향년 86세로 선생이 작고하면서 막을 내린다.황선생은 사후를 대비, 궁중음식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자녀들을 같은 길로 이끌어 그 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장녀 한복려씨가 무형문화재 궁중음식 기능 보유자로, 둘째 한복선씨, 셋째 한복진씨가 전수자로 대를 잇고 있다. (‘지화자’라는 궁중음식 한정식 음식점 운영) 황혜성선생은 숙명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명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성균관대학교 가정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 1957년 스승인 한희순과 공동으로 저작한 ‘이조궁정요리통고’를 시작으로 10권의 궁중음식과 전통음식 전문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저술‘이조궁정요리통고 (李朝宮廷料理通考)’ (1957년)‘한국요리백과사전’’한국의 미각’ (1976년)‘한국의 요리’ (1982년)‘한국음식’ ‘전통의 맛’ (1985년)‘한국의 식(韓國의 食)’ (1987년)‘한국의 전통 음식’ (1989)‘조선왕조 궁중 음식’ (1993)‘한국음식 대관-6권 궁중의 식생활’ (1997년)‘우리 음식 백 가지’( 1998년) 등 상훈대한민국 교육훈장 목련장 (1985년)문화훈장 보관장 (1990)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가을 저녁(밤) 秋夕, 제례(祭禮)가 아닌 차례(茶禮)로...
며칠 후면 추석 秋夕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한가위 둥근 달에까지 전염되어 올해 달빛은 왠지 나이 드신 부모님의 병색이 완연한 낯빛처럼 안쓰럽고 안타까울 것만 같다. 추석을 문자 그대로 풀면 '가을 저녁(밤)'인데 참으로 운치가 느껴지는 말이다. 한가위 밝은 달이 휘영청 뜨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명절로 삼아 기념을 했을까? 다들 저녁밥 차려 먹고 밖으로 나왔을 것이고 한 해 농사를 끝냈으니 한시름 놓게 된 마음은 꽉 찬 달만큼이나 여유와 안도감으로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농사를 혼자서 지은 게 아닐 터이니 모내기부터 김매기를 거쳐 추수까지 함께 더불어 작업을 했던 마을 사람들은 기쁨을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는 동료들이었을 것이다. 힘든 일을 같이해 본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지를…. 하늘엔 밝은 달이 떠 있고, 땅에서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돌며 술을 나눠 마시고, 음식을 같이 나누고, 서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아낌없이 한데 모았을 것이다. 추석은 그래서 진정한 대동단결의 한마당이다. 생산 시스템이 협업을 기초로 하는 농업구조에서 이러한 축제는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개인들을 결속시켜 다시 생산성 확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었을 것이다. 기계 문명의 산업화를 거쳐 디지털이 주도하는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영토 삼아 랜선을 통해 타인과의 제휴와 협력을 이루며 살고 있지만 점점 고립되며 고독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추석에는 또한 차례(茶禮)를 지낸다. 조상신을 받드는 제례(祭禮)와는 다른 성격의 의식(儀式)이다. 문자에서도 드러나듯이 원래 온갖 음식들 다 상에 올려 거창하게 준비하는 의식이 아니라 차 한잔 따르고 부담 없이 고인을 추념하거나 불가에서처럼 앞에 앉아 마주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절차가 니었을까? 집 안에 위패라도 있고 사당이라도 갖춘 집이라면 시시때때로 차를 올리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처럼 간단히 고개 숙여 선조들의 정신과 업적을 복기하며 그 뜻을 새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서민들은 비싼 차를 마련할 돈이 없어서 숭늉 한 그릇 혹은 조촐한 박주(薄酒) 한 사발 올려놓고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서 차 한잔 올려놓고 죽은 자에게든 산 자에게든 예를 갖췄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 까닭은 배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물었을 것이다. 찻잔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호호 불어가며 또렷한 시야를 확보하고, 찻그릇에서 배어 나오는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인생의 향기를 지니길 소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례는 그래서 깨달음의 예식이다. 후대로 넘어오면서 사대부 집안이 가문의 위엄을 자랑하기 위해 산해진미를 갖추고 으스대기 위한 향연으로 본질이 바뀌게 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양반을 동경하던 서민들이 빚을 내서라도 따라 하겠다고 가랑이 찢어지는 줄 모르고 허례허식에 빠지고 말았다면, 향기로운 차가 그 맛을 잃고 변질한 것만큼이나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고 있다. 하지만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 사회로 들어가고 있는 지금, 우리 주변에는 명절인데도 대동단결할 동료가 없다. 농사를 지을 때 가장 최소한의 노동 단위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집단이었던 가족마저도 해체되고 말았다. 이제는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27.2%(520만 3,000가구/1,956만 가구)를 차지하며 1위를 차지하면서 이제는 가족도 곁에 없는 시대이다. 또한 따뜻한 차 한잔 앞에 두고 지혜를 구하기는커녕 바쁜 아침 출근길에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졸린 눈과 지친 몸을 추스르며 허겁지겁 어디론가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기에 바쁜 시대이다. (모처럼의 연휴를 맞아 자기를 돌아보며 성찰할 시간도 없이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밀려오는 짜증과 졸음에 고함치지 않는 게 다행인 시절인데, 올해는 그마저도 막히고야 말았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오늘 하늘에 걸린 달은 어떻게 보면 참 공허하고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컴퓨터 바탕에 깔린 스크린 세이버의 화면처럼 생명력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귀뚜라미 소리도 안 들리고 현실보다 더 화려해 보이지만 정감은 하나도 안 느껴지는 그런 가을밤의 풍경이다. 명절은 뜻깊은 무엇인가를 기념하는 날이라고 하는데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답답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일은 집 앞 공원에라도 나가 좀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겠다.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금밭이 생태공원으로, 인천 소래습지생태공원
소래염전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논현동,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포동, 월곶동, 장곡동에 있던 염전으로 조선총독부에서 건설한 제4기 염전 중 하나이다. 1935년부터 1937년에 걸쳐 준공되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하에서도 상당한 소금을 생산했으나 제염업이 사양산업이 됨에 따라 채산성악화로 1996년 7월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소래염전은 바닷물을 저수지, 두 개의 증발지, 결정지를 거쳐 소금을 생산했는데 인부들은 고된 작업을 거쳐 소금을 만들었다. 지금도 염전의 흔적으로 소금창고와 가시렁차(사진)가 남아 있다.(가시렁차는 ‘가소링차(가솔린차)’가 와전된 것으로 추정) 소래습지생태공원은 갯벌, 갯골과 폐염전 지역을 다양한 생물군락지 및 철새도래지로 복원시켰으며 각종 해양생물을 관찰하고 천일염을 생산했던 시설물과 자료를 볼 수 있는 전시관과 다양한 동, 식물을 탐구해 볼 수 있는 자연학습장, 그리고 광활한 갈대 및 풍차, 산책로, 쉼터 등이 마련되어 있다. 인천 시민의 편안한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수도권 등 각지에서 찾는 명소이다. 천천히 공원 모두를 다 둘러보려면 4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보고 싶은 곳만 골라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코스가 준비되어 있어 언제나 편하게 돌아 볼 수 있다. 또한 걷는 중간중간에 원두막이 설치되어 있어 쉬엄쉬엄 갈 수도 있다. 다만 습지라는 특성상 숲이 없어 태양이 작열할 때 걷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