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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붓을 닮은 꽃, 붓꽃
선비의 붓을 닮은 꽃, 붓꽃
국명: 붓꽃(학명:Iris nertschinskia) 각시붓꽃 - 금붓꽃과 비슷한 크기의 식물로 야산의 건조한 지역에서 자란다. 도시에서 개나리, 진달래가 막 꽃을 피울 때쯤 시골 야산 양지바른 풀숲에 자그마하고 이름다운 자태를 들어내는 들꽃이 있어 옛사람들은 붓꽃이라 불러왔다. 이른 봄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옛날 선비들이 쓰던 붓을 닮았다 하여 붓꽃이라 불리어왔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칼 모양을 닮은 잎 때문에 용감한 기사를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 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의 국화가 되었다. 타래붓꽃 - 경기도 소래 포구와 같은 바닷가에 자라는 붓꽃과 식물로 잎이 말리는 게 특징이다. 꽃 가게에서는 아이리스(Iris)라 부르곤 하는데 아이리스란 이 식물의 학명이다. 붓꽃을 뜻하는 아이리스란 단어는 외국에서 여성의 이름에 흔히 쓰이는데 아이리스란 원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이름으로 제우스와 헤라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무지개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전설이 있다. 노랑무늬붓꽃 -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환경부에서는 멸종 위기종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붓꽃은 관상용으로 기르거나 민간에서는 뿌리를 주독을 푸는 데 이용하거나 폐렴을 치료하는 약으로 써왔다. 붓꽃과에 속하는 식물 중 노랑붓꽃(Iris koreana)은 학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반도 전역에서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여 왔다. 그러나 요즘 전 국토 적으로 앓고 있는 환경 오염과 개발로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져 매우 희귀한 꽃이 되었다. 금붓꽃 - 금색 꽃을 피우는 금붓꽃 각시붓꽃 - 금붓꽃과 비슷한 크기의 식물로 야산의 건조한 지역에서 자란다. 노랑꽃창포 - 유럽에서 들여와 관상용으로 심고 있는 붓꽃과 식물로 단오 때 머리를 감는 창포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특히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은 그들의 색깔이 아름다워서 사람들에 눈에 쉽게 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움은 야생화를 이 땅에 희귀한 존재로 만든 원인 중의 하나이다. 사람들은 등산하다가 눈에 보이는 꽃을 무작정 꺾는다. 그러나 꽃이란 식물의 생식기이다. 꽃을 피워 자손을 만들기 위해 추운 겨울을 땅속에서 지내다가 좋은 기회를 봐서 정성껏 피워올린 꽃을 아무런 가책 없이 꺾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식기관을 잃어버린 식물은 자손을 퍼뜨릴 기회를 잃어버리고 죽어가거나 기약도 없는 다음 해 봄을 기다려야 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 곁을 떠나고 있는 아름다운 한국의 야생화를 보호하는 마음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 주길 이 글을 빌어 간절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최한수평생을 자연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생태학자.야생화 사진, 조류 사진, 자연풍광 사진 찍기와 오지 탐험이 취미.생태문화콘텐츠연구회 회장. 환경부 환경교육 홍보단 강사, 청계천 조류탐사교실 강사, 경희대 이과대학 강사, 동덕여대 교양학부 강사 등.저서로는 ‘학교 가는 길에 만난 나무 이야기’, ‘숲이 희망이다.’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식물 백과’, 생태시집 ‘노루귀’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시장(9) 우전(牛廛), 우시장
한국의 전통시장(9) 우전(牛廛), 우시장
(사진:전국 한우협회) 소는 예부터 한국인의 삶과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며 중요한 가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살아서는 힘겨운 농삿일에 커다란 노동력을 제공해 주고 죽어서는 살코기•뼈•가죽 등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논•밭 다음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인간에겐 그야말로 꼭 필요한 든든한 재산으로 여겨져 왔다.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농우(農牛)들을 팔고 사는 우시장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전문시장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우시장은 쇠전 또는 소시장, 우전(牛廛)으로 불렸다. 이곳에서는 소만 거래하지 것이 아니라 돼지, 염소, 양 같은 가축을 같이 거래해 통상적으로 가축 시장이라 불렀다. 우시장이 서면 흥정을 붙이는 중개인인 ‘쇠전꾼’들이 달려들고 흥정이 벌어지게 된다. 예전에는 파는 이나 사는 이가 대충 눈대중으로 체중을 가늠해 가격을 정해 밀고 당기는 흥정이 정겨운 풍경이기도 했고 정든 한우가 새로운 곳에 가서도 잘 살 것을 당부하며 눈시울을 훔치기도 했다. 하지만 우시장 주변에는 투전꾼들이 모여들어 순박한 시골사람들의 피 같은 소판돈을 노리는 사악한 풍경들이 이때도 있었다. 우전에서 소는 외상거래가 거의 없고 현금으로만 거래되는 특성상 농가에서는 소를 자식처럼 키워 논과 밭을 장만 할 때, 자녀들 혼인할 때, 자식들 대학 학자금 낼 때도 소는 키우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부의 상징이었다. 우시장 풍경 중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여성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집 안에서는 여성의 경제권이 있지만 소의 거래에서는 오롯이 남성들이 몫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시장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진: e영상역사관) 전국 곳곳의 주요 우시장이 있었지만 수원 주변의 넓은 들을 갈던 튼튼한 황소를 사고 팔던 수원 우시장은 예부터 이름이 높으며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인 수원갈비의 모태가 되었다. 경기 남부와 충청북도 북부지역에서 들어오는 소들을 주로 거래하는 충북 장호원(감곡)의 우시장, 충남 홍성 우시장, 판매와 도축이 함께 이루어지는 강원도 횡성의 우시장, 경기도 양평의 우시장, 전북 남원(함평)의 우시장 등은 각 지방에는 중요한 우시장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전국의 우시장들은 대개 새벽 2시경에 개장하여 오전 6, 7시경에 파장하므로 장이 서는 날 새벽이면 모여든 사람과 소들로 불야성을 이루었다.우시장은 왜 꼭두새벽에 열렸을까? 지금 현대화 돼 전자경매로 바뀐 우시장 풍경은 새벽이 아니었어도 가능했을텐데… 정확한 답은 없지만 그 시절 상황으로 이유를 유추해 볼 수가 있겠다. 그 옛날 장은 약속된 날에 편한 장소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일 때 열렸다. 그러니 우시장뿐만 아니라 모든 물품을 거래할 수 있는 장이었다. 그래서 우시장은 그 지역 장날에 맞춰 함께 선 것이고 우시장이 새벽에 열려야 마치고 다른 장도 열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일찍 우시장을 파하고 이어 다른 장도 열리는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자연스런 규칙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새벽에 우시장이 서야 도축장에 신선한 소를 공급할 수도 있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지금도 우시장이었던 주변에는 유명 한우 음식점들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시장이 제도화하기 시작한 것은 1914년부터이다. 소의 거래는 반드시 우시장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한우보존에 관한 훈령 및 시행규칙’이 시초였다. 이때부터 사설 우시장은 인정되지 않았고 부(府), 읍, 면장이 개설한 농회가 운영됐다. 지금의 가축시장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렇지만 기존 우전과의 마찰로 1921년에는 ‘조선가축시장회’라는 상인회가 설립돼 서울과 평양에 특설한 4개의 상설 우시장을 제외하고 과거 재래시장처럼 5일장으로 이어 갔다. 이후 1963년 ‘축산법’ 제정으로 차츰 질서를 찾기 시작했고 1964년 말에는 전국적으로 667개의 우시장이 운영됐다. 1975년에는 경매제도가 시범적으로 도입됐고 1977년 ‘축산법’ 개정으로 종전의 거래방법인 중개 거래와 병행하여 경매제도가 이뤄지도록 법 제화되었다. 경매제도가 시행되면서 우시장에서는 우형기(소저울) 사용이 의무화되면서 눈대중에 의한 체중 문제, 거래가격 시비가 사라졌다. 초창기 우형기도 전자식 저울로 바뀌었고 수기식 경매도 전자식 경매로 진화되면서 옛날의 우시장 모습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우전시대 때 소는 송아지를 잘 낳을 수 있는 암소인지, 힘을 잘 쓸 수 있는 황소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골반이나 다리발육 상태 등을 중점적으로 점검했으나 지금은 육질이 좋고 기름기가 적은지가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