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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우리 얼의 근본이 되는 선비사상과 유적들
청렴결백하고 지조를 중시하는 사람, 어떤 처지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고고한 정신, 세속에 물들지 않고 늘 학문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선비라고 한다. 그런 선비의 방은 비록 문갑과 서안, 책장, 글씨로 된 병풍이 고작이지만 그 분위기에서는 선비의 높은 지조와 정신이 엿보인다. 한국의 학자들 가운데 한국 전통문화의 본질을 선비정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선비정신은 의리를 지키고 절개를 중히 여기는 도덕적 인간의 정신을 말한다. 이는 조선조의 지도이념인 유교에 입각한 지배계층의 생활신조로서 말하자면 조선시대를 이끌어온 이상적인 문화유형의 하나다. 인격이 높은 선비일수록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산림에 묻혀 도학(道學)과 덕행을 쌓는 것으로 본분을 삼았다. <선비는 민족원기의 기탁(寄托)이며, 국가명맥의 최후 보루이다>, <선비의 치욕은 국가의 치욕이다>라고 할 만큼 당시 선비의 위상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드높은 경지를 이루며, 학문의 연원이 되어 이 시대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다. 도학 군자로 일컬어지는 이퇴계, 이율곡을 비롯하여, 산림유(山林儒)의 표상이 돼온 남명 조 식 등의 지고한 선비 정신은 우리의 전통적인 인간관으로 한국 사상과 철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였다. 지필묵연(紙筆墨硯) 문방으로 사용되던 사랑방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하던 도구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의 필기구이다. 이 네가지는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서로 떨어져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비들은 금구슬이 앞에 있을지라도 흙처럼 여기는 청렴함을 자랑으로 삼지만 문방사우를 탐내는 욕심만큼은 '선비의 벽(癖, 무엇을 치우치게 즐기는 병증)'으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이들 문방사우는 서로의 벗일 뿐 아니라 선비에게도 벗이 되어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내내 옆에서 친구가 되어 주고 공부를 통해 귀결(歸結)되는 그들의 글정신을 나타내어 알리게도 하였다.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55호, 경북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선현(先賢)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士林)에 의해 설립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자치운영도 담당하였다. 서원에서는 성리학적이고 도학적인 것을 교육하는 동시에 선현에 대한 제향(祭享)도 중요시하였는데, 이는 원생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처음으로 정치적 문화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 서원은 1542년 주세붕(周世鵬)에 의해 세워진 백운동(白雲洞) 서원으로 고려의 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1550년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서(額書, 사액사원의 줄임말, 임금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고 노미, 토지 등을 하사한 서원)를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서원의 뒤에는 몇백년 묵은 소나무숲이 울타리를 치고 있고 앞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흘러 맑고 밝고 조용한 학문을 연마하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을 이루고 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사적 제170호, 경북 안동군 도산면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도산서원은 본디 퇴계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려고 세운 서당이었으나 스승이 타계한 후 그의 제자들이 서원을 세웠다. 옛날 선비들이 한번쯤은 찾아보고자 선망하던 곳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마당에는 과거의 선비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 퇴계가 아끼던 살구나무가 우거져 있다. 경내에는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손수 지은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는 아담하고 소박한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서 퇴계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제자들의 기거를 위해서는 용운정사(龍雲精舍)를 지었다. 이 건물은 '工'字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공부를 하는 집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며, 창문 등 가옥의 구조가 앉아서 공부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선비의 공부는 책에서만 얻는 것이 아니고 학생과 스승은 함께 먹고 자면서 지식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도리까지도 연마하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도산서원이라는 편액(扁額)은 당대의 최고 명필이던 석봉 한호(石峯 韓護)가 쓴 것이 전해지고 있다. 다산초당(茶山草堂)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그가 저술한 책 모두를 일컬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고 하는데, 총 500여권에 달하는 이 책들은 철학, 윤리,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저술은 대부분 그의 유배시절에 지어진 것으로 유배라는 난관을 오히려 승화시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관직에 임하여서나 혹은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고 끝없이 연마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의 위치나 지위에 상관없이 고고한 선비의 정신은 대를 이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가 저술의 대부분을 썼던 다산초당(茶山草堂) 역시 한 채의 작은 집에 불과하지만 선비정신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증거로 우리에게 남달리 다가오는 것이다. 전주향교(全州鄕校)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향교는 지방에서 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관학교육기관이다. 상징적인 기능만으로 이해되던 유교적 이념과 정치구조의 내용을 기층사회에까지 침투시키려 설립한 향교는 지방사회 내부에서 자기발전 도구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유학교육의 성과를 과거제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어 관인후보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향교의 구성은 서울의 성균관을 닮아 선현을 배향하는 공간과 학생을 교육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배향공간이 우위에 있다. 전주향교도 이러한 향교 중의 하나로 고려말에 세워졌으며 총 99칸의 대규모 건물로 되어 있어서 전라도 53관의 수도향교(首都鄕校)라 칭하였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향교의 설립취지에서 우리는 지(知)와 행(行)의 일치를 추구하던 선비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성균관(成均館)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의 뒤를 잇는 조선시대의 유학교육기관으로 인재양성을 위한 국립대학과 같은 유학교육기관이다. 성균관에의 입학에는 자격제한이 있어서 대체로 양반 사대부 자제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성균관에 입학한 유생들은 기숙사에 머물면서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은 소학정신을 바탕으로 한 주자학정신을 배우며 동시에 성현을 섬김으로써 이론과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성현을 모시는 공간은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숙소인 동/서재(東/西齋) 등과 함께 어울려 있으면서 기단이나 건축양식 등이 이들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이렇게 유교의 교육과 성현을 모시는 것은 성균관 뿐 아니라 지방의 향교에도 이어져 이러한 교육체계는 조선의 선비를 양성하는 모든 교육기관에서 추구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퇴계 이황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로, 그의 학자로서의 인품은 초상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공적인 도리와 개인의 이익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부조리의 사회였기 때문에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구별을 뚜렷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따라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일은 정치현실에서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도(道)를 전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둔하고자 했던 그에게 끊임없이 관직이 권해졌고, 관직에 올랐다 물러나기를 여러 차례한 끝에 결국 영원한 은둔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에서 벗어난 외직을 지망하였다. 그 후로도 번번히 관직을 사양하였고 69세가 되자 결국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관직과 낙향을 번갈아 하던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도산서원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3과 한국인
3과 한국인
3은 한국인들이 특별한 애착을 가진 숫자이다. 우리 민속신앙의 하나로 하늘과 땅의 매개자로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빌어주는 이 솟대 위에서도 세 마리의 오리가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천, 지, 인의 삼재(三才)를 기본으로 음양의 조화가 비로소 완벽하게 이루어진 이 숫자는 오랜 옛날부터 길수(吉數), 또는 신성수(神聖數)라 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과 철학에 깊숙히 배어있다. 유별나게 3을 선호한 우리 민족은 신화시대로 부터 역사시대, 오늘의 과학문명 시대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민족의 가슴에서 숨쉬고 있다. 단군신화에서의 환인, 환웅, 단군의 삼위일체적 존재는 곧 완성된 하나를 상징한다. 불교에서도 불법승(佛, 法, 僧), 이 세개가 모일 때 불교가 성립되며 민속에서는 출산 후 금줄을 칠때 아들의 경우 고추와 숯을 각각 세개씩 매달았다. 사람이 죽으면 삼년동안 집안에 머물다가 승천한다는 믿음에서 3년상을 치루었는데 이처럼 3은 관혼상제를 비롯하여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과 속담, 격언 등에서 친근하게 사용돼 왔다. 우리의 전통춤에서도 그 기본이 어르고 맺고 푸는 삼박자로 되어있고 간장 고추장 된장의 3장은 기본적인 우리의 민족음식이다. 신을 모셔도 삼신을 모시며 내기를 해도 삼세번을 한다. 한복에 착용하여 우아함과 화려함을 더해주는 장식용 노리개도 대부분이 3작이다. 삼월 삼짇날(三辰日 음력 3월3일) 길수로 알려진 양수 3이 겹친 삼월 삼짇날은 특히나 3을 선호하는 한국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날로 새겨지고 있다. 산과 들에 꽃이 피고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온다고 하는 이 날은 처음보는 짐승을 보고 신수점을 치는데 개구리는 복을, 노랑나비, 호랑나비는 좋을 일을, 흰나비는 상(喪)을 의미한다.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절에 가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하는 <삼짇 불공>을 드리며, 무당을 불러 굿을 하거나 용왕신 산신 등에게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기도 하였다. 또한 <삼짇 고사>라 하여 상주가 아니라도 목욕재계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으며,부녀자들은 들판에 나가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화전을 해먹는가 하면, 풀싸움과 꽃놀이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각 가정에서는 대개 삼짇날 장을 담그는데 담근 장에는 고추나 숯을 띄워놓고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쳤다. 한글/훈민정음 15세기 중엽에 세종과 그 주변의 학자들에 의해 창제된 훈민정음은 우리나라의 여러 학문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이며, 확고한 전통을 가진 우리 고유의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한자와는 전연 별개의 독자적인 체계에서 발생한 문자로 놀라운 창조적 정신을 보여주며, 음운 연구의 커다란 성과로서 그 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음절의 삼분법, 즉 초성, 중성, 종성이다. 이것은 중국 음운학의 이분법의 전통을 비판 수정한 것으로 훈민정음이 그처럼 훌륭한 문자체계일 수 있는 것은 이 삼분법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천 지 인의 구성으로 우주가 형성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글 역시 그 우주를 반영하고 있다. 자음으로 이루어진 초성과 종성은 하늘과 땅을 뜻하며, 모음으로 이루어진 중성은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우리 문화의 상징인 한글에도 음절의 삼분법, 즉 3과 관련된 한국인의 사상과 수에 대한 관념을 엿볼 수 있다. 삼작노리개 한복 저고리의 겉고름이나 안고름, 또는 치마 허리에 차는 여성 장신구의 하나인 노리개는 매우 화려하고 그 모양도 갖가지로 다양하고 섬세하여서 우리의 고유 의상에 아름다움을 한층 더 강조해 준다. 단조로운 의상에 액센트를 주어 의상 전체와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노리개는 보통 홍, 남, 황의 삼색을 비롯하여 분홍, 자주, 보라, 옥색 등 열두색에 이른다. 흔히 삼작 노리개로 불리워지는 이유는 이처럼 3색을 기본으로 하여 다양한 색상의 고운 빛깔의 다회로 매듭을 맺고 술을 드리운 노래개 세 점을 한 벌로 쳤기 때문이다. 궁중에서는 8월 한가위를 비롯하여 가례, 생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 왕비를 비롯하여 행사에 참가하는 귀부인들 까지 모두 삼작노리개를 찼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전에 문안을 드릴 때 금박 스란치마에 당의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보통 삼작노리개는 금, 은, 백옥, 비취, 산호 등 각종 보석을 세공한 패물을 중심으로 위 아래에 매듭을 맺고 봉술, 딸기술 등을 쌍으로 늘어뜨렸다. 장도를 중심으로 박쥐 등의 은세공을 한 이 삼작노리개는 주로 일반인들이 착용하던 것이다. 삼색나물 나물은 반찬 가운 데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우리 음식이다.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를 각각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갖은 양념을 하거나 물에 불렸다가 삶아서 볶아 보기좋게 한 접시에 올린 이 삼색나물은 혼례, 상례, 제례를 비롯하여 명절 등의 음식에 빠지지 않는다. 이와같은 음식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은 숫자 3을 유달리 선호했으며 더불어 일상의 모든 개념에 천 지 인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색을 의미한 이 나물은 시금치는 청을, 도라지는 황을, 고사리는 홍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삼성혈(三姓穴) 사적 제134호. 제주시 이도동 전설에 의하면 탐라국을 처음 연 시조(始祖)는 고을나(高乙那)/ 부을나(夫乙那)/ 양을나(梁乙那) 세 사람인데 이들이 바로 이 구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전설의 구멍은 평지에 각각 수 m를 간격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 '3'이라는 숫자를 여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 개의 구멍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그 의미로 볼 때에 안정적이며 완벽한 출발을 상징하고자 하는 탐라국 사람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근처에는 이 곳을 기념하는 석비가 있고, 시조를 모시는 사당인 삼성전(三姓殿)이 있다. 천마총 청동솥(天馬塚 靑銅鼎) 신라 6세기, 높이 26.7, 배지름 21.6, 입지름 14.6cm 경주 천마총 출토 동글납작한 몸에 뚜껑이 있고, 어깨부분에 뚜껑 손잡이와 같은 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청동솥이다. 특히 이 청동솥에는 동물의 다리를 본딴 3개의 다리가 달려있다. 불전에 향불을 담아 올리는 그릇으로도 사용되었던 이 청동솥의 다리는 어떠한 요철 바닥에서도 안정되게 세울 수 있도록 세개로 되어 있다. '3'은 가장 완벽한 구도를 가지기 때문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조각, 회화, 공예, 건축 등에서 선호하던 숫자이다. 한국에 있어서 '3'의 의미를 갖는 문화재는 멀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삼족오(三足烏)로부터 신라와 고려의 삼층탑과 삼존불, 가까이는 조선의 삼층장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있음으로써 비로서 세계가 완성되고 살아 움직이게 된다고 보았던 '삼'의 표현은 시대나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근본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백제 7세기, 높이 : 본존 2.8m, 보살입상 1.7m, 반가상 1.66m 국보 제84호,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2-40 삼존불상은 본존을 중심에 세우고 양쪽에 협시보살을 세우는 것으로 이러한 구성은 이미 인도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로 전래되면서 부처님을 모시는 하나의 단위로 생각되었다. 협시보살은 본존 옆에서 공양도 하고 때로는 본존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는 등 본존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미적으로도 좌우가 대칭이 되므로 안정된 구도를 얻을 수 있다. 불상을 어떤 재료로 만드는가와는 관계가 없어서 마애불, 석불, 금동불 등 다양한 삼존불에서 접할 수 있다. 이 서산마애삼존불은 삼국시대의 마애불을 대표하는 삼존불로서 특이한 점은 다른 삼존불의 경우에는 양 협시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이 삼존불의 협시 중 우협시보살은 보주를 들고 서 있는데 반해 좌협시보살은 반가사유자세를 취하고 있다. 백제의 미소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표정처리가 매우 뛰어난 것은 눈은 크게 뜨고 입은 다문채 한껏 미소짓고 있기 때문이고 이로인해 부드럽고 풍만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