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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사찰건축
경상북도 영풍군 부석면 북지리 봉황산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문무왕 16년(676) 2월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어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 도량(道場)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부석사의 창건에는 대룡(大龍)과 부석(浮石)으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의상대사의 구도심(求道心)을 지켰던 선묘(善妙)아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있어 더욱 숭고한 종교정신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량수전 뒤에 있는 부석과 이 절이 개수(改修)될 때 무량수전 밑에서 발견되었다는 거대한 석룡(石龍)에 의해 더욱 진하게 와 닿는다. 부석사에는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17), 조사당(국보 19), 소조 여래좌상(국보 45), 조사당 벽화(국보 46) 등과 같은 많은 문화재가 있다. 국보 제67호,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화엄사는 지리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화엄종의 중심사찰로 창건 이래 수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었으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되어 황룡사의 승려 연기(煙氣 또는 緣起)가 신라 경덕왕 때 세웠음이 밝혀졌다. 화엄사의 각황전은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중층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웅장한 규모이다.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다포의 복잡한 공포(貢包)가 중층의 팔작지붕 처마 밑에 꽉 차 있어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2층이나 내부는 하나로 통해 있다. 건물의 중앙에는 기다란 불단이 설치되어 있고 그 밑에는 석각(石刻) 화엄석경(華嚴石經)이 있어서 웅장한 건물의 규모와 함께 각황전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 경상남도 양산군 하북면 지산리 영축산.보물 제144호, 남북 15.8, 동서 10.1m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신라에 불경과 불상이 구비되지 못함을 안타까와하던 자장(慈藏)의 감명깊은 자기헌신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이 절에는 불상이 없는데, 이는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절의 가람배치는 이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그 앞에는 불사리에 참배할 수 있도록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신라 때 지어진 후 여러차례의 중건을 거쳐 현재의 건물은 조선 인조 19년(1641)에 중건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 때의 건물양식은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의 연화문 축대와 계석(階石) 문양이 남아 있다. 통도사의 대웅전은 특이하게도 지붕이 T자로 북쪽만 제외하고 합각(合閣, 용마루)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지붕만 T자이고 법당의 평면은 방형이며, 뒷벽은 금강계단에 예불하기 위하여 벽으로 막지 않고 문을 달고 불상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을 놓았다. 또한 천정은 국화와 모란이 조각된 꽃천정으로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하여 법당의 운치를 높여준다. 국보 제15호, 경상북도 안동군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 봉정사는 682년 의상(義湘)이 세운 사찰로 종이로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봉이 내려 앉은 자리에 세웠다거나 또는 화엄기도를 드리기 위해 이 산에 오른 의상을 청마(靑馬)가 안내하여 이곳에 앉았기 때문에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절의 극락전은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는 고려 중.후기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양 옆에 광창(光窓)이 있으며 다른 3면은 모두 벽으로 막았다. 건물의 내부구조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까지 이어진 고식(古式)으로 여겨져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양식적으로 선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상량문(上樑文)에 1363년 건물의 지붕을 수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으로도 증명되었다. 전남 승주군 송광면호남의 명산 중의 하나인 조계산(曹溪山, 또는 송광산(松廣山)이라고도 함)에 위치하고 있는 송광사는 삼보사찰(三寶寺刹) 중의 하나로 승보사찰이라고도 불리우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변에는 이름 그대로 소나무 숲이 깊게 이어지고 수많은 계곡과 하천, 병풍처럼 둘러선 봉우리들이 있어서 명찰(名刹)과 더불어 명승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라말엽 혜린선사(慧璘禪師)에 의해 창건되었을 당시에는 승려 30-40명 정도의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정혜사(定慧社)가 이곳에 옮겨와 정착한 이후 고려시대를 지나면서는 15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하는 등 대찰(大刹)로 발전하였다.송광사에는 하사당(下舍堂, 보물 263호)이라는 특수한 구조의 건물이 있는데 이는 선객(禪客)들이 거처하던 건물로 일종의 승방이다. 이 건물의 특징은 부엌의 기능을 고려하여 천정을 연등천정으로 하였는데 이는 용마루를 뚫어 환기구멍을 설치한 것으로 이러한 설비는 송광사 주변의 살림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42), 『고종제서(高宗制書)』(국보 43)의 국보와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외의 수많은 보물이 있어서 명실공히 대찰로서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의/식/주] 주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주거
초가집과 기와집, 돌담과 흙담, 아기자기한 산과 시냇물,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서낭당, 사당, 향교 등등. 정적하고 단조한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 마을의 정황이다. 자연 경관을 중요시 했던 우리 민족의 주거 형태는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이처럼 조화와 균형 속에 배치되었다.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주거 문화는 선사시대의 움막과 원두막과 같은 생나무 집에서 출발하여 수혈 주거, 귀틀집, 초가, 기와집의 형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기원 전 4세기 경 농업 생활의 정착과 함께 우리의 고유한 난방장치인 온돌이 발명되면서 부터 초가집과 기와집이 일반화 되었으며, 기후와 생활 양식에 따라 홑집과 겹집,양통집, 곱은자 집 등의 다양한 형태가 생겨났다. 이처럼 집의 형태나 크기가 달라지면서 주거 생활의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곡물 저장과 가축 사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남녀의 활동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하기도 했다. [양반가] 보물 제414호,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양반가옥은 대체로 짙은 회색의 기와를 얹고 벽에는 흰색을 칠하며 이와 고동색의 나무색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왕궁이나 사찰에 있는 단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운데 이는 금지 이전에 꾸미지 않는다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건물들은 여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건물마다 고유의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안채, 남자와 그의 손님을 위한 사랑채, 그리고 하인을 위한 행랑채 등이 벽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직선으로 설계된 경계선 안에 질서있게 배열되어 전체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단정한 구성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대문을 다시 통해야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쪽에는 담장을 따로 쌓아 사당을 마련하였다.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낙안읍성 초가는 한국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이엉으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털털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이러한 초가가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선이 우리네 나직한 산등성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집의 울타리도 지붕을 닮아 각이 지거나 선이 곧은 것이 별로 없고 다만 땅이 생긴 모양대로 경계를 긋고 낮은 돌담을 울퉁불퉁 쌓거나 혹은 가는 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것이 전부이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벽으로 단순 소박하며, 방도 큰방/작은방/부엌과 헛간이 서로 붙어 'ㅡ'자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은 'ㄱ'자도 볼 수 있다. 그림은 전남 낙안의 벌교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한국 전통 초가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민속자료 33호,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김진호 집 너와집은 나무판이나 청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른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산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지역과 평안도 산간지역, 강원도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화전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적송이나 전나무 등을 가로 20-30cm, 세로 40-60cm, 두께 4-5cm 정도로 켜서 서로 포개어 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 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이 되게 눌러 놓기도 한다. 너와와 너와의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서 환기도 잘되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며, 단열효과도 커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하다. 그림은 대표적인 너와집으로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의 집으로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너와집은 산림보호책,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사적 제267호,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서울 한강변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대부분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에 속한다. 주거의 형태는 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수혈주거로 원형에 가까운 말각(抹角) 방형의 바닥을 마련하고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둘레에는 기둥을 세워 원뿔형의 지붕을 얹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식 주거형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원두막과 같은 형태이다.내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고, 간혹 저장구덩이가 있기도 하며,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뚜렷하다. 좁은 입구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바람을 막고 햇빛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다양하나 대체로 4-5인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당시의 가족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기와 화살촉, 그물추, 뼈바늘 등이 있는데 문 가까이에서는 화살촉 등 남성용구가 주로 발견되는 반면 문에서 가장 먼 곳에는 화덕이 있으며 그 근처에서 뼈바늘, 토기 등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거지 내에서 위치에 따라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별식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별식
입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으로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 하는 이 신선로는 대표적인 궁중요리의 하나이다. 산해진미를 모두 한 그릇에 담아 끓여 여러가지 맛과 영양소가 골고루 섭취될 수 있도록 만든 합리적인 음식으로 신선로틀에 육류, 해산물, 채소 등을 색색으로 돌려담고 장국을 부어 끓이면서 먹는다. 구이는 열을 가하는 음식의 조리법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다. 끓이는 요리와 달리 그릇이 없이도 가능한 음식이기 때문에 토기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발달해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대개 불고기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요즘에 와서 생긴 말이고 고기를 얇게 져며서 굽기 때문에 너비아니구이라고 하였다. 또한 쇠고기와 함께, 각종 채소와 버섯을 길게 썰어 양념한 다음 대나무 꼬치에 꿰어 구운 것을 적(狄)이라고 한다.너비아니구이는 쇠고기를 얇고 넓죽하게 져며서 갖은 양념으로 조미하여 불에 구운 것으로 상에 내놓을 때에는 밤, 잣, 실고추 등 고명을 얹어 먹음직스럽게 보이도록 한다. 옛부터 한국인들은 매 절기마다 특별한 음식을 해먹으며 유희와 오락을 즐기는 행사를 벌여왔다. 특히 사철에 나는 식품으로 음식을 해먹었는데 정월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아홉가지 나물을, 단오에는 수릿날이라고 하여 수리치로 절편을 만들어 먹었으며 팔월 한가위에는 햇곡식으로 송편을 빚고 밤, 대추, 감 등과 같은 햇과일을 마련하여 조상에게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등 정월 초하루부터 섣달 그믐날까지 갖가지 행사가 연이어 졌다. 중삼절인 3월에는 화전을 해먹는 풍습이 유명하다. 이는 평소 집 안에만 갇혀 살던 부녀자들이 봄이 완연한 들판에 나가 진달래 등 꽃잎을 따다 묽게 반죽한 쌀가루에 예쁘게 얹여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전을 부쳐먹으며 하루를 즐겼는 데, 꽃으로 빚은 부침이라 하여 화전(花煎)이라 한다.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양념과 장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양념과 장
우리나라 음식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의 식자재를 가지고 여러가지 맛을 내는 비결로 양념을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음식의 맛을 돋구기 위해 쓰이는 양념으로는 파, 마늘, 생강, 고추, 참기름, 후추, 식초, 설탕 등이 있으며, 한국만의 독특한 발효식품인 고추장과 된장, 그리고 간장 등도 이에 속한다. 양념은 생것을 그대로 쓰기도 하고 건조시키거나 볶아서 쓰기도 하며 기름을 짜서 쓰기도 한다. 양념은 음식을 조리할 때 주로 다지거나 썰어서 넣는 경우도 있고 곁들이는 조미료 속에 섞기도 하며 음식을 먹을 때 직접 첨가하기도 한다. 고추장, 된장, 간장은 우리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조미료이다. 예로부터 각 가정에서는 해마다 장을 담그는 일이 연례행사로 치뤄졌으며 주부의 요리솜씨 또한 장맛으로 따지기도 했다. 콩이 주원료인 된장은 특히 단백질이 풍부한 발효식품으로 항암효과에도 뛰어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소금과 함께 요리의 간을 맞추는 간장의 주원료는 콩과 밀이며 메주를 띄워 만든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오래 띄우고 익힐수록 간장의 맛은 더 좋아진다. 간장을 걸러내고 남은 건더기로 만들어지는 게 바로 된장이다. 된장은 국이나 찌개 뿐만 아니라 상추나 깻잎 등에 밥을 싸먹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추장은 찹쌀, 맵쌀, 밀, 보리 등을 원료로 메줏가루, 고춧가루, 엿기름, 소금 등을 섞어서 만들며, 만드는 솜씨에 따라 맛이나 빛깔이 달라지기도 한다. 고명은 양념의 일종으로 맛을 내기 보다는 시각적으로 모양과 빛깔을 곱게 하여 음식맛을 돋우는 장식용 역할을 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주로 다섯가지의 자연색을 사용하는데 흰색과 노란색은 계란에서, 빨간색은 고추에서 검정색은 석이버섯이나 표고버섯에서, 녹색은 호박, 미나리 파 잎 등으로 낸다.
60만 번의 손길이 만들어 낸 화문석
60만 번의 손길이 만들어 낸 화문석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강화 화문석장 60만 번의 손길이 필요한 명품중의 명품- 화문석 [花紋席] 꽃의 모양을 놓아 짠 돗자리.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의 특산품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했으며 장흥고(長興庫)에서 수요를 담당했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등의 문헌에 의하면 옛날의 고급스런 화문석은 용수초(龍鬚草)로 만들었으며 문양에 따라 황화석(黃花席) · 잡채화석(雜彩花席) · 오조룡석(五爪龍席) · 국화석(菊花席) · 오채룡문석(五彩龍紋席) 등으로 불렸다. 강화화문석장-전경 강화화문석장-개장 전. 시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푼이라도... 강화화문석장 강화화문석-문양 이 정도면 좋은 가격인데...강화화문석장 제작방법은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莞草) 화문석을 직조하는 노경소직법(露經疎織法)과 등메를 제작하는 은경밀직법(隱經密織法)으로 크게 나뉜다. 먼저 사초과에 딸린 1년생 풀인 왕골(완초)을 거두어들여 찬이슬을 맞혀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리는데,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이다. 다음에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화문석 제작시에는 염색한 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나간다. 세 사람이 너비 6, 7자의 화문석 1장을 짜는 데는 5일쯤 걸린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문양으로는 용(龍) 문양, 호(虎) 문양, 원앙과 봉황 문양, 학(鶴) 문양, 매화 문양, 모란 문양, 문자 문양 등이 있고 근래에는 주로 거북 · 사슴 · 학 등 장생동물과 수복강녕(壽福康寧) · 만수무강(萬壽無疆) · 구름 · 소나무 등이 도안된다.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전통 상차림
[의/식/주] 식생활: 한국 옛 사람들의 전통 상차림
예로 부터 한국인들은 상차림에 있어서도 아이들에게는 밥상, 어른에게는 진지상, 임금님의 상은 수라상이라고 하여 예의를 다하였다. 평상시 아침 저녁으로 임금에게 올리는 수라상에는 대원반, 소원반, 사각반의 세 가지 상에 차려지는데 기본찬 이외에 열두가지를 놓는 십이첩 반상이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명산물들 가지고 궁중의 주방 상궁들의 빼어난 솜씨로 올려지는 이 수라상에는 밥과 찬품으로 구성한다. 수라는 임금의 밥을 일컫는 말로 흰밥과 팥밥, 미역국과 곰탕의 두가지 탕, 맑은 조치와 장으로 맛을 낸 조치, 찜, 전골, 세 종류의 김치 등 기본찬 외에도 구이, 전유어, 수육, 숙채, 생채, 조림, 젓갈류, 마른반찬, 회, 별찬 등으로 꾸며지며 이 열두가지 찬들은 재료와 조리법이 중복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써서 만든다. 생일이나 환갑 등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 큰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여러 사람이 함께 둘러 앉아 음식을 먹도록 하는 상이다. 주식은 면류나 떡국, 만두국 가운데 계절에 맞는 것으로 내고 탕, 찜, 전유어, 편육, 적, 회, 잡채나 구절판 등의 채, 그리고 신선로 같은 특별한 음식을 내놓는다. 제례는 조상을 공경하는 유교사상의 하나로 지금까지 계속돼 오고 있다. 죽은 지 3년이 지나 소상, 대상이 끝나면 해마다 죽은날의 전일을 제삿날로 정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고인을 기린다. 제사에 올려지는 상차림은 일반 상차림과 달리 그릇에 있어 굽이 높은 제기를 사용한다든가 음식의 재료도 작게 썰지 않고 통으로 하고 양념도 약하게 한다. 주, 과, 포, 탕, 적, 혜, 채소, 청장, 편을 각기 정해진 제기에 담아 놓으며, 제기를 놓는 위치는 가풍이나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사진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이방자 여사)의 제사상차림 차례를 지낸 후 세배를 온 손님에게 내는 정월 초하루의 상차림이 다. 떡국과 함께 전, 적, 찜, 과일, 인절미 등 떡을 비롯하여 각종 한과에 이르기까지 먹음직스럽고 풍성하게 차려져 나온다. 떡국은 대표적인 명절의 하나인 설날의 음식이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정월 초하룻날에 떡국을 끓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반드시 떡국으로 새해의 첫 식사를 하였다. 떡국을 한 그릇 먹었다는 것은 나이를 한 살 먹었다는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가래떡이라고 하는 흰떡을 어슷하게 썰어 육수에 넣고 끓이면 바로 떡국이 된다. 지금과 달리 예전에는 설날이면 집집마다 떡을 치는 소리가 정겨운 풍취를 자아내기도 했다. 폐백은 혼례를 치르고 난 후 신부가 신랑의 부모님을 비롯한 시댁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나서 처음 드리는 음식이다. 음식의 내용은 집안의 가풍이나 지방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서울에서는 대체로 자손 번영을 상징하는 대추를 붉은 실에 꿰어 둥글게 돌려담고 고기를 다져 편포나 장포를 만든다. 또 지방에 따라서는 육포 대신 닭을 통째로 쪄서 고명을 얹어 장식하기도 한다. 폐백음식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청홍 보자기에 싼다. 우리나라 전통 상차림의 하나인 7첩 반상이다. 반상(飯床)은 밥을 주식으로 하여 밥을 먹기에 어울리는 음식, 즉 반찬을 구성한 상차림을 말한다. 우리나라 식문화의 특징 중 하나는 이처럼 한 상 위에 모든 음식을 차려내는 데에 있다. 주식과 부식이 뚜렷하여 어느 한가지를 독립된 식품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상 차림은 밥, 국, 김치를 기본으로 여기에다 곁들여지는 반찬의 가짓수에 따라 3첩, 5첩, 7첩, 9첩 등이 된다. 7첩 반상에는 기본인 밥, 국, 김치 외에 간장, 초간장, 초고추장 등의 3가지 종지, 그리고 첩 수에 드는 반찬으로 찌개, 찜, 숙채, 냉채, 구이, 조림,전, 마른반찬, 회 등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