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왕녀의 태실을 모신 울진 북면 나곡태실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만 밤색 표지판이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 몰라 마을회관을 갔는데 아무도 없고 집집마다 불러도 아무도 나와 보질 않더니 가려고 차로 왔는데 기척도 없던 집 세 군데서 할머니들이 나오신다.
나곡태실을 가는 길을 묻는데 딱 한 분이 아신다고 가르쳐 주신다. 대충 찾아 보겠다며 나섰는데 가운데 집 연세가 제일 많으신 할머니가 커피를 먹고 가라며 두 잔을 타 오시니 너무 감격이다. 가르쳐준 데로 갔는데 오른쪽에 있다고 하길래 오른쪽만 보고 가다 못 찾아서 산을 넘어 검성동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길 그녀가 길가 옆 뭐가 보인다며 다시 후진을 해서 보니 안내석이 쓰러져 있다.
혹 쓰러진 방향은 숲 속인데 들어가 보고길 있음 올라가 보겠다며 숲길을 들어서니 산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올라가 보고 내려 오다 보니 갈 땐 보이지 않던 꼬리진달래가 보인다.
태실비 뒷쪽에 움푹파인곳이 도굴범들이 태함과 태항아리, 태지석을 도굴해간 자리이다. 현재 태지석의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있으나 태함과 태항아리, 태지석는 행방을 모른다.
전면에 만력사십칠년육월이십삼일생(萬歷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 왕녀아지씨태실(王女阿只氏胎室)
뒷면에 만력사십칠년십일월초사일(萬歷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만력47년은 광해군 11년(1619)으로 음력 6월 23일 날 왕녀 아기씨가 태어나고 그래 11월 4일에 태실봉에 안치하고 비를 세웠다는 뜻이다.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 1남 1녀의 자식을 얻었는데 문성군부인 류씨에게서 폐세자 질(桎)을, 숙의 윤씨에게서 옹주를 만력 47년에 낳았다.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나 박원(朴遠)에게 시집간 옹주의 출생년도가 같아 숙의 윤씨가 생산한 옹주의 태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곡태실(羅谷胎室)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산 65번지 소재.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후손이 태어나면 태를 잘 보관하였다가 길일을 택하여 길지에 태를 안치하던 석실로서 신라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전래되었다.
왕실의 태는 관상감(觀象監, 조선 시대 천체 운행에 관한 측량과 풍수지리, 달력 등을 제작하던 기관)에서 묻을 장소를 물색하고 안태사(安胎使, 정해진 길지에 태를 묻는 일을 담당한 임시 관리)를 정하여 묻게 하였으며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
태함(胎函, 태항아리를 보관하는 큰 그릇)과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胎壺-태호), 태지석(胎誌石, 태실에 묻힌 태의 주인공의 출생관한 내용을 기록한 돌판)으로 구성되며 태함을 안치한 후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