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기행 1)종로 도심 길을 따라 우리 삶의 이야기를 걷다

종로 3가~흥인지문~창신동
기사입력 2021.12.17 00:20 조회수 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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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내부의 중추 지역, 도시 핵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지역을 도심(都心)이라 부른다. 이 도심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잊혀진 역사 이야기가 곳곳에 배어있다. 도심 기행은 이 숨은 이야기를 찾아가는 시간 여행이다. 길도 편해서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걷기이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도심 중의 도심, 종로의 숨겨진 이야기를 따라 세운상가부터 광장시장을 거쳐 창신동까지 편하게 걷기로 한다.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있는 종로3가 역 12번 출구를 나와 50여 미터쯤 걸으면 우측에 유명한 세운상가가 있다. 세운상가는 종로3가와 퇴계로3가 사이를 잇는 주상복합상가 건물군을 통틀어서 부르는 이름으로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이다. 1966년 김현옥 서울특별시장 당시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1966년 착공해 2년 후인 1968년 완공되었다.세운상가1.jpg
세운상가라는 이름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 뜻을 가지고 있다. 총 길이는 약 1km로 1967년부터 72년까지 세운, 현대, 청계, 대림, 삼풍, 풍전, 신성, 진양상가 등 8개가 차례로 건립되었다.

60년대부터 인근 미군부대에서 나온 각종 고물들을 고쳐서 판매하는 사업장이 자리잡은 동네였으나 이후 가전 등 각종 전자 제품의 메카로 자리잡게 된다. 80년대에는 국내 컴퓨터의 대명사였던 삼보컴퓨터가 개인용 PC를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상용 PC를 개발한 곳이기도 하고 국산 8비트컴퓨터로 유명했던 희망전자, 한국마이컴, 석영전자, 골든벨 등이 탄생한 국내 PC산업의 태동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국내 전자 산업의 메카이던 이곳도 도심 과밀 억제 정책으로 현대적인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면서 하나 둘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상권이 쇠락하고 슬럼화 되어버렸다.세운상가2.jpg
서울시는 2006년 세운상가 일대를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해 세운상가군 전체 상가를 철거한 후 공원을 조성, 주변 일대를 고밀도로 개발하는 계획이었으나 시민들의 반대와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사업성이 악화되어 전면 철거 계획은 보류된다. 그러다 2014년에 서울시가 세운상가 존치 결정을 공식화하면서 ‘다시•세운’ 프로젝트를 통해 건물과 상가를 재생하는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세운상가를 지나 건널목을 건너면 광장시장쪽 출입구 왼편에 우리은행(구 상업은행) 건물이 이 보인다. 1974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1층이 특이하게 거리보다 1m 정도 높이 위치해 있는데 사거리에 면한 벽에는 민중 판화가 오윤과 그의 친구인 오경환, 윤광주가 같이 작업한 높이 3.4m, 건물 전면 32m에 걸친 황색의 테라코타 벽화가 있다. 무심히 지나치면 눈에 잘 뛰지 않는다. 건물이 지어질 때 함께 제작된 작품이다.
오운테라코타.jpg
우리은행을 지나 흥인지문(동대문) 방향으로 가다가 JW 메리어트호텔 앞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 8번 출구 뒷편에 작은 전차차고터 표지석이 있다.

서울전차(서울電車)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 시내,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약 8 km) 길이의 단선궤도를 운행하던 노면전차를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차로도 불렸으며 해방 이후 경성전기주식회사(현재의 한전)에서 운영해 경전전차(京電電車) 또는 경전(京電)으로도 부르기도 했다.

1899년 5월 20일(음력 4월 초11일)에 개통식을 가지고 운행을 시작했는데 서울전차는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교토에 이은 두 번째였으며 수도에 부설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전차차고터.jpg
1960년대에 이르러 차량의 노후화, 투자 소요 발생 등 전차사업은 난항에 빠져 69년간 운행하다 1968년에 서울전차의 운행이 중단된다. 이후 전차 차고지 부지가 유휴지로 남아 있다가 1970년 전차 차고지에 동대문종합시장이 건립되고 그 중 한 동에 고속버스터미널이 건립되었다. 1972년 건립 당시 터미널은 도로를 두고 서쪽은 군산, 이리, 연무대, 전주 방면 노선이 있었고 건너편 동쪽은 김천, 경주, 포항, 울산 방면 노선이 운행했다. 그러다 5월 11일에 광주고속, 천일고속, 한남고속, 한일고속으로 이루어진 벤츠고속이 서쪽 터미널 옆으로 이전해 부산, 대구, 대전 방면 노선도 운행했다.

전차터를 뒤로 하고 이스턴호텔 뒷길로 들어서니 앞에 멋진 교회가 보인다. 말로만 들었던 동신교회이다. 김광석, 윤형주, 조영남 등 인기있던 가수들이 이 교회 합창단 출신이라 알려져 있었고 인근에 살던 박수근 화백이 다니기도 한 유명 교회로 1956년 창립된 역사와 전통의 교회이다. 2014년에는 서울시에서 교회 본당 건축물을 근현대 문화유산으로 인정,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서울시 종로구 종로44길 43)동신교회.jpg

(사진:동신교회 홈페이지)


동신교회를 지나 대로변으로 나오면 좌측이 창신동 방향, 우측이 청계천 방향이다. 창신동방향으로 돌면 바로 도로변에 작은 안내 사인물이 있다. 박수근화백이 살았던 집터임을 알려 주는 곳이다.(서울시 종로구 지봉로 11, 창신동 393-16)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 모은 돈으로 구입한 18평 한옥으로 12년 동안 살았는데 전쟁 후 빈궁한 삶의 현실을 그려낸 대표작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그려졌다고 한다.

1965년 5월 6일, 향년 51세, 박수근(1914~1965)은 간경화증으로 서울 평생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고난한 삶을 마친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가난으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던 박화백은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 일가를 이뤘지만 안타깝게도 가난을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가난 탓에 시력을 잃고 이후, 오른쪽 눈만으로도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어릴 적부터 크리스천으로 앞에 언급한 인근 동신교회 신자이기도 했다.박수근집터.jpg
박수근집터 옆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했던 민간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고층 의류 쇼핑몰로 바뀌었다.

박수근집터를 지나 건널목을 건너 창신동쪽 좌측으로 조금가면 우리농산물마트 창신점이 보이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서 직진하다 우회전을 하면 좌측으로 백남준기념관이 보인다. 서울시가 도시재생사업 일환으로 백남준 집터에 위치한 한옥을 매입, 백남준기념관을 조성하고 카페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서울 종로구 종로53길 12-1 61)백남준.jpg


백남준기념관1.jpg

비디오아트의 선구자이며 전위 예술가로 유명한 백남준(1932~2006)이 1937년에서부터 1950년까지 13년을 살던 생가터로 그의 예술과 삶을 기리기 ‘백남준을 기억하는 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곳에는 오래된 TV와 라디오를 비롯해 어머니가 쓰던 재봉틀과 어린 시절의 백남준의 손때가 묻은 애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 그가 해외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고향인 창신동 집을 몹시 그리워했다고 한다.

박수근과 백남준 집터는 인근 1호선 동대문역과 1,6호선 동묘역 지하철 주변지역안내도, 출구 유도사인 등 설치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백남준기념관을 나와 좌측 종로구보건소 동부진료소를 통과해 뒷길로 접어들면 낙산냉면 건물이 보이는데 이곳이 가수 배호의 집터이다.(서울시 종로구 지봉로5길 8)배호집터.jpg
배호(裵湖, 1942년 4월 24일 ~ 1971년 11월 7일)는 1942년 중화민국 산둥성에서 장남이자 첫째로 태어나 29살의 나이에 신장염으로 요절한 대한민국 대표 가수이다. 묘지는 경기도 양주시 신세계 공원묘지에 있다. 아명(兒名)은 배신웅(裵信雄)이며 본명은 배만금(裵晩今)이다.

1963년 김광빈(외삼촌) 악단과 김인배 악단에서 드럼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배호라는 예명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한다.

1960년대 후반 ‘누가 울어’,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 많은 애창 히트곡을 남겼다. 1981년 MBC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가수' 1위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2005년 6월 '광복 60년 기념 KBS 가요무대' 여론조사에서는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은 국민가수 10인'에 선정됐다.

배호집터에서 조금만 직진하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측길을 따라가다 보면 얼마 안돼 작은 절이 보인다. 작은 문화재 박물관이라 불리는 안양암은 절 전체가 서울특별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서울 종로구 창신5길 61)안양암.jpg
안양암이 있는 낙산 주변은 조선 시대 각종 무속인과 크고 작은 절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안양암은 1889년 조선 왕실의 원찰로 평등당 성월스님(속명 이창진)이 창건한 사찰로 승려들의 도성출입이 금지됐던 당시 산중불교를 도심에 포교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안양암에는 대웅전, 관음전, 명부전, 금륜전(金輪殿)과 영각(影閣), 산신각, 칠성각 등의 건물이 있는데 특히 1909년에 만들어진 마애관음보살좌상과 손바닥 크기의 1,500불상이 모셔진 천오백불전(千五百佛殿)이 백미이다.

안양암1.jpg


안양암 마애불.jpg

마애관음보살좌상은 돌로 불상이 들어 앉을 반원형의 공간을 만들어 중앙에 관음전(觀音殿)이라 새기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되어 있다. 천오백불상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유일한 예이고 석고불(石膏佛)로서는 초기에 속하는 희귀한 불상이다.

안양암은 이 동네 출신 가수 32살에 요절한 가수, 김광석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 그의 팬들이 매년 겨울 기일에 추모제를 지내 유명하다. 안양암 다음으로 갈 곳이 바로 김광석 집터이다.(서울시 종로구 창신5길 47) 안양암에서 나와 좌측 길로 내려가다 보면 얼마 안가 좌측에 4층의 빨간 벽돌 연립이 있는데 이곳이 김광석이 학창시절을 보내며 동신교회도 다녔던 집이다. 12살 때부터 결혼하기 전까지 16년간(1975년~ 1990년) 살았으니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다. 여기에서 '거리에서', '말 하지 못한 내 사랑',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히트곡이 작곡됐다.김광석집.jpg
그러나 아쉽게도 김광석을 나타내는 그 흔한 안내 표지도 없이 그냥 스쳐 지나면 모를 길바닥에 동판으로 그가 살았던 집터라고만 쓰여 있고 건물 입구에 그의 아버지인 국가유공자의 집 김수영이라는 문패만 덩그라니 붙어 있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으로 가기 위해 김광석집터에서 좌측으로 200여 미터쯤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서 좌측으로 50며 미터쯤 좌측 언덕길에 위치한 4층 현대식 건물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종로 창신동 골목 끝자락에 위치한 주변과는 다른 생경한 건물이다. ‘이음피움’은 실과 바늘로 천을 이어서 옷을 만든다는 의미의 ‘이음’과 꽃이 피어나듯 소통과 공감이 피어난다는 뜻의 ‘피움’을 합친 이름이다.봉제박물관.jpg
서울시가 2018년 국내 최초 도시재생 사업 일환으로 설립한 곳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만들어졌다. 외벽에 있는 가로줄무늬는 실이 돌돌 감긴 '실타래'와 석재를 층층이 쌓은 '낙산성곽'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봉제역사관은 봉제 산업의 역사와 현재를 보여주고 미래를 제시하는 공간으로 실, 단추, 재단가위, 패턴 자, 재봉틀뿐만 아니라 과거 재단사들이 사용했던 재봉틀, 패션 화보와 월간 봉제계 잡지, 각종 신문기사 등 봉제업 관련 영상과 서적 등 다양하게 전시가 되어 있다.

박물관에는 전문 도슨트(Docent,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가 있어 40여분 친절하게 해설을 하며 투어 가이드를 해주며 체험도 할 수 있다.

해설에 따르면 강북-강남의 격차를 해소하고자 시작된 서울시 뉴타운 사업에 지정된 창신, 숭인동의 지역주민들은 지속적으로 뉴타운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고 사업 시작 이래 최초로 뉴타운 지구 지정이 해제되는 첫 사례가 이곳이었다고 한다. 이후 2014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선정되며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 옛 것을 무조건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삶의 기억과 가치를 되살린 현장이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봉제 산업을 꽃피운 창신동 이음피움역사관이라고 한다.창신동1.jpg
역사관 1층은 안내데스크가 있고 2층에는 한국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봉제산업의 역사를, 3에는 봉제산업 장인들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4층은 창신동 봉제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카페로 꾸며져 있다.

창신동은 노동자의 인권 보장을 주장하며 청계천에서 전태일열사가 분신한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평화시장과 동대문종합시장의 배후지로서 많은 소규모 봉제공장이 들어선 곳으로, 지금도 1천여 개의 봉제공장이 있다. 도슨트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디자인부터 4단계로 하루 만에 옷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창신동이 유일하다고 한다.창신동 봉제.jpg
전시품 중에는 10개의 가위가 눈길을 끄는데 가위는 수십 년간 봉제인과 함께 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람들의 생김새가 모두 다른 것처럼 장인들의 손에 머물렀던 가위 역시 손잡이에 천이 덧대어져 있거나 끝이 닳아있는 등 제각기 다른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봉제박물관 가위.jpg

3시간여의 종로 도심 기행을 마치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 오늘을 볼 수 있었으며 미래를 어떻게 가꾸어 가야 하는가를 사유하게 한 귀중한 타임머신의 시간이었다.

창신동.jpg


단무원심 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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