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화계의 위대한 개척자, 춘사 나운규(1902-1937)

기사입력 2021.04.05 08:27 조회수 3,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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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사 나운규는 일제강점시기에 활동했던 한국영화의 선구자이다. 그의 영화사적 위치는 그대로 한국영화의 성장과정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 나운규는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1918년에 만주 간도의 명동중학에 입학했지만 일제에 의해 학교가 폐교되면서 만주를 떠돌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출감 후 1924년 부산으로 내려가 조선 키네마주식회사의 연구생이 되었다.

윤백남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아 일약 명배우가 되고 독립운동을 배경으로 한 저항적인 작품 '아리랑'을 직접 쓰고 감독, 주연을 맡는다. 1927년에 나운규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옥녀', '벙어리 삼룡' 등을 만들어 예술적 성취와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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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랑' (매일신보 관련 기사들)


이후 부친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임자없는 나룻배'에 출연하고 '아리랑'을 발성영화로 제작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36세로 요절했다.

그는 영화인으로 활동한 15년 동안 총 29편의 작품을 남겼다.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모든 작품은 약자에 대한 동정과 악덕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다. 그는 최초의 시나리오 작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배우 양성자이며 연기지도자였으며 민족영화의 선각자로서 '아리랑'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영화의 정신과 수준을 크게 끌어올린 불세출의 영화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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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훈전자사료관 사진과 글.
나운규는?
1902년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금성(錦城)이며 호는 춘사(春史)이다. 회령보통학교를 졸업 후 간도의 명동중학(明東中學)에서 수학했다. 부친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인 나형권(羅亨權)으로 군대해산 후 회령에서 약종상을 했다고 전한다.

나운규가 수학했던 간도의 명동중학은 독립군 양성 기지로 민족운동의 중심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했을 때에는 명동중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회령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나운규 역시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경찰의 수배를 당했다. 연해주로 도주한 나운규는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내전이 한창이던 시베리아를 방랑하던 중 러시아 백군의 용병으로 입영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용병 생활에 대한 회의로 탈영하여 훈춘(琿春)을 거쳐 북간도로 돌아왔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은 더욱 활기를 띄었다. 나운규는 독립군 단체인 도판부(圖判部)에 가입했다. 나운규의 은사이기도 했던 박용운(朴龍雲)이 책임자였던 도판부는 독립군이 간도에서 회령으로 진격하기 전 터널이나 전신주를 파괴하는 임무를 띤 결사대였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위해 청산리 인근으로 갔던 나운규는 그곳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독립군에게 “당신 똑똑한데 군대말고 공부를 해라”라는 조언을 듣는다. 공부를 통해서 더 큰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는 충고에 나운규는 독립군 부대를 나와 서울로 간다.

서울에 온 나운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훈춘사건을 일으켜 북간도로 출병한 일제는 도판부 관련 비밀문서를 획득하고 도판부 책임자인 박용운 등을 곧바로 체포하고 곧이어 나운규를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재판에 회부된 나운규는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1921년 3월부터 1923년 3월까지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

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회령에서 머물던 중 인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1924년 1월 북선지역을 순회하던 극단 예림회(藝林會)가 공연차 회령을 방문했을 때 예림회에 가입한 것이다. 나운규가 가입한 예림회는 함흥에 동명극장(東明劇場)과 함흥극장(咸興劇場)이라는 주식회사 형태의 두 개 극장이 설립되는 것을 계기로 지두한(池斗漢)을 중심으로 20여명의 청년들이 조직한 소인극단이었다.8) 예림회 단원 대부분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의 여파로 고향으로 돌아온 도쿄유학출신의 학생들이었기에 연극공연을 위해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때 윤백남(尹白南)이 만들었던 민중극단(民衆劇團) 출신의 전문연극인인 안종화(安鍾和)가 문예부장으로 초빙되어 이들을 이끌었다.

신입회원으로 가입한 나운규는 연구생으로 예림회 무대에서 본격적인 연극배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예림회는 북선공연을 마치고 자금난에 직면하여 문을 닫게 된다. 문예부장 안종화는 민중극단 출신들이 주축이 된 무대예술연구회(舞臺藝術硏究會)의 연락을 받고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나운규는 연극 활동에 관심이 많던 김태진(金兌鎭, 예명 남궁운), 주인규와 함흥역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안종화를 배웅하며 이별을 아쉬워했다.
1926년 10월 1일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되었다. ‘마치 어느 義烈團員이 서울 한구석에 폭탄을 던진 듯한 설렘을 느끼게 했다’는 이경손(李慶孫)의 회고처럼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리랑의 열기는 단성사에서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영되었던 이 영화는 1942년 조선인들이 징용으로 끌려와 있던 홋카이도의 탄광에서도 상영되어 조선인 노무자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아리랑은?
아리랑의 주인공은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미치광이가 된 최영진(나운규 扮)이었다. 소작인의 아들인 최영진에게는 여동생 최영희(申一仙 扮)가 있었다. 최영희는 오빠의 친구인 윤현구(南宮雲 扮)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마름 오기호(朱仁奎 扮)가 영희를 차지하려 한다. 미친 영진은 영희와 현구 사이를 훼방 놓던 오기호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

6·10만세운동 직후에 제작된 아리랑의 근저에는 토지를 매개로 한 계급문제가 있었다. 마치 “토지는 농민에게”와 같은 6·10만세운동의 슬로건을 연상시킴으로써 6·10만세운동의 열기를 거리에서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듯 했다. 고소설이나 일본 신파를 번안하여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당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 인식과 이를 극적으로 묘사한 아리랑의 제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아리랑 영화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예컨대 카프 소속의 평론가 최승일(崔承一)은 소설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가 하고 있다며 이전의 조선영화 모두를 불살라버려도 될 정도의 거상(巨像)이라 극찬했다. 이렇듯 아리랑은 식민지 조선영화인들에게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자 넘어야 할 산이었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살다 간 나운규는 아리랑을 통해 일제강점기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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