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무용 기틀 마련, 장단과 가락을 무대화한 대가, 한성준

기사입력 2021.01.29 10:02 조회수 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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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준.jpg

한성준(韓成俊, (1875-1942))은 우리 춤과 장단, 가락을 무대화하고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장본인으로서 한국 전통무용의 기틀을 닦은 대가이다.


그는 진지한 연구와 탁월한 예술성으로 역사적으로 전해오고 있던 춤을 체계화, 민간에서 민중들이 하던 일상적인 일의 몸짓, 생활습속 등이 어우러진 민속예술을 기반으로 하여 무당, 광대 등 천민계급의 재인활동에 궁중무악요소까지도 수렴해 체계화했다,

또한 학춤을 비롯한 여러 전통무용은 민족적 전통과 유산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켰으며 봉건주의 사상이 기조를 이루던 전통무용의 관념을 바꾸어 놓았다.

한성준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6세 때 외조부로부터 춤과 장단을 배우기 시작, 14세 때 줄타기와 민속예능을 배우고 홍성, 서산, 태안 일대의 각종 연회와 굿판에 참가했다. 이어 28세 때 전국 유랑길에 올라 각지의 민속 예능을 익힌 후 31세 때 서울에 정착해 원각사 등에서 고수로 활동했으며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받기도 했다. 원각사가 없어지자 협률사(協律社)•연흥사(延興社) 등과 각 지방을 순회하며 공연한다. 이 때 고수로 열 다섯 차례의 창방(唱榜, 경연 대회)을 치르면서 1고수(鼓手) 2명창(名唱) -고수가 1번(첫째)이고 소리꾼이 2번(둘째)-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50세 후반부터는 전문 전수교육기관인 조선성악연구회에서 그 동안 배우고 익힌 춤들을 무대작품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63세 때인 1938년 전통춤 교육의 산실인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 한영숙, 강선영, 김천흥 등 기라성같은 무용가를 배출하여 전통춤의 가장 뚜렷한 맥인 벽사류(壁史流, 벽사 한영숙씨의 춤을 이어가는)를 이루었다. 이와 함께 처용무, 춘앵무 등 궁중무용을 집대성했으며 한국 전통춤의 대명사로 통하는 승무, 태평무, 살풀이, 학춤 등을 정립했다.승무.jpg

(승무,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태평무.jpg

(태평무,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그가 무대화한 승무와 태평무(국가의 평안을 위해 추었던 한국 전통 무용) 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전승되고 있다. 1930년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고 1934년에는 무용만을 전문으로 하는 조선무용연구소를 창설하고 제자를 기르는 한편, 1935년에는 부민관(府民館)에서 ‘한성준무용공연회’를 가졌다.

한성준은 일본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며 한국 무용을 일본에 소개해 1941년에는 일본의 모던일본사가 주는 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그의 기라성 같은 제자들은 김삼화, 이매방을 비롯해 김천흥, 김보남, 이강선, 정인방 등이 있다.
1942년 7월 11일, 69세를 일기로 손녀 한영숙에게 모든 춤을 물려주고 숨을 거둔다.

한성준선생 손녀 한영숙선생에게 1969년 승무를 배워 정통 승무 맥을 지켜가고 있는 이애주교수(서울대)에 따르면 한성준선생은 3천 마디의 뼈가 움직여서 한국의 춤이 된다는 말씀을 했으며 5천년 역사를 면면히 내려온 우리 몸짓을 이 시대에 되살려 낸 분이라고 한다.

- 1874년 6월 12일 충남 홍성군 홍주골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 6, 7세 때 장안에서 민속무용과 줄타기로 유명했던 조부 백운채에게서 춤추기와 북치기 공부.
- 8, 9세 때 줄을 타거나 재주를 부렸고 14세가 되면서 홍성 서학사에게 줄과 재주 3년간 공부. - 17세(1890)에 수덕산에서 박순작 문하로 20세가 넘도록 춤과 장단 공부.
- 21세(1894)에 동학혁명 참가, 22세부터는 굿중패, 남사당의 놀이패, 당굿, 모래굿패 등에 참가하여 10여년간 유랑생활.
- 35세(1908)에 완성된 춤과 북장단을 가지고 한양길에 올라 고난의 연속이었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명고수로서 서울에 정착. 당시 송만갑 협률사의 일원으로 정기적인 무대에 고수로 출연.
- 55세(1930)에 선생은 전문적인 전수교육기관인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 50년 고수생활을 정리하고 춤 활동을 새로이 시작.
- 61세에는 한성준 조선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음악과 한국 춤을 정리, 제자들에게 교습 시작.
- 62세에 부민관(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첫 작품발표회.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고대춤, 궁중춤, 향토춤을 집대성하여 제자들과 함께 공연. 공연된 작품은 승무, 태평무, 학무, 한량무, 신선무, 살풀이, 검무, 오방신장무, 사공무 등.
- 67세에 새로운 춤들을 재구성해 시민회관 별관에서 2회 공연. 같은 해 제자들을 이끌고 조선문화말살정책의 총본산인 일본 동경 히비야 공회당에서의 첫 해외 공연.
- 69세(1942)에 이르러 거동이 불편해지자 손녀 한영숙에게 모든 춤을 물려주고 낙향.
- 69세(1942) 7월 11일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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