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빈다?

기사입력 2020.06.20 10:54 조회수 1,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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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느닷없는 부고 소식을 두 번이나 받았다. 한 명은 초등학교 동기 동창의 본인 상, 국내 유력한 신문사의 논설위원과 정책부장 등을 거쳤고 아직 현직에 머물고 있던 기자의 신분이었는데 허망하게 가버렸다.


다른 한 명은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의 중고등부 동기 친구의 누님으로 대학생 시절에는 함께 어울려 교회 생활을 하며 얼굴을 익히 뵀던 분이셨는데 역시 이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셨다. 해당 초등학교와 교회 친구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수십 명이 온라인으로 애도를 표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양쪽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를 지켜봐야만 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필자가 이 원고를 쓰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동창생 방에 또 다른 친구의 부친상 부고가 떠서 지금, 이 순간에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애도 문구가 계속 올라오고 있다.)


애도문의 홍수 속에서 평소에는 별로 접하지 않고 지냈던 '명복(冥福)'이라는 말에는 한자로 冥(어두울 명)이라는 글자가 쓰이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어둡다'라는 뜻 이외에도 '어리석다' '아득하다' '(생각에)잠기다' '깊숙하다' '어둠, 밤' '(검은)하늘-(깊은)바다'와 더불어 앞의 모든 뜻을 아우르고 있는 '저승'이란 뜻풀이가 나온다. 요즘 포털 사이트의 한자 사전에는 어원까지 밝히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어서 거기까지 결과를 살펴보게 되었다.

"冥 자는 ‘어둡다’나 ‘어리석다’, ‘(생각에)잠기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冥 자는 冖(덮을 멱) 자와 曰(말씀 왈) 자, 六(여섯 육) 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冥 자의 갑골문을 보면 冖 자 안에 口(입 구) 자와 廾(받들 공) 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어두운 곳에 갇힌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양손이 벽을 향해있는 것은 너무나 어두워 벽을 더듬고 있는 모습이다. 口 자는 어두운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소리를 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금문에서는 曰 자와 바뀌었다. 양손 역시 六 자로 바뀌면서 지금의 冥 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출처: 네이버 한자사전, 자원(字源) 검색)

명복.jpg

희미하게 추정으로만 어림짐작했던 글자의 모양과 어원까지 명확하게 살피고 나니 별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상투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좀 더 마음을 담아 애도의 뜻을 전할 수 있을 듯하다. 검색 결과에 보면 사람이 어두운 곳에 갇혀 있는 모습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얼핏 스치는 생각으로는 죽은 사람이 관에 누워 영면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벽을 더듬고 있다고 했다. 죽어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팔을 뻗어 필사적으로 지하에서 빠져나오겠다고 몸부림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갑골문이 만들어져 사용되던 시대는 중국 하(夏)나라 이후 세워진 상(商)나라 후기로 추정되고 있는데 기원전 1300년쯤부터 기원전 1100년까지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 시절에 사람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벽에 갇혀 있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죄수가 감방에 갇혀 형벌을 치르는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혹은 도시를 떠나 여행을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동굴 같은 곳에 갇혀 부상이 깊어지며 점점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어느 상황에 해당하든 간에 공통적으로 갇힌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틀림없이 죽음에 대한 공포감과 더불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온 고립감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위와 같은 극한 상황에까지 몰려 갇히는 처지를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으로 매우 유사한 체험을 느낀 적이 있었다. 지금부터 몇 년 전 필자의 선친께서 작고하셔서 상주로서 빈소를 지키며 상주 노릇을 하던 때였다.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긴 한적한 새벽 시간에 망연자실 누워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으로 깨달음의 순간이 번쩍하고 섬광처럼 내리쳤다. 사람이 죽어서 유명을 달리한다는 것이 고인의 측면에서 보자면 존재의 소멸에 해당하는 멸(滅)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인과의 인연의 끈이 끊어지는 절(絶)에 부합되는 것이구나 하는 그런 통찰이었다.

명복1.jpg

죽음은 그렇듯 고인이 된 망자에게만 속한 사건이 아니라 남아서 지키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서사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가뜩이나 감염에 대한 불안감이 커가고 있는데 거기에 타인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답답함으로 우리는 점점 지쳐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어쩌면 힘겹게 사투를 벌이고 있는 우리 자신에게 '명복을 빌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렇게 점점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비는 말은 따로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죽을힘을 다해 사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혼자서 힘에 부치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명복이 아니라 ‘건투’를 빌어야 한다!

김광진프로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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