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게 비지떡!’ 박달재 금봉이 이야기

기사입력 2019.10.15 16:20 조회수 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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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1.jpg

 

 

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나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에 금봉이야~ 

 

나이가 어느 정도 든 분이라면 이 노래, ‘울고 넘는 박달재’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구수한 가락에 애닯은 가사로 사랑을 받은 이 노래의 소재가 되는 박달재는 실제로는 천둥산에 있지 않다. 또한 ‘천둥산’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산 이름도 ‘천등산(天登山)이다. 박달재는 시랑산에 있고 천등산(806m)에서는 동쪽으로 약 9km 쯤에 위치하고 있다. 천등산 연이은 마루라 뜻에서 이등령이라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천등산은 북동쪽으로는 시랑산(侍郞山:691 m), 남쪽에 인등산(人登山:667 m)으로 이루어져 북동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제천천(提川川)을 이루어 충주호(忠州湖)로 흘러들고 서남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영덕천(永德川)을 이루어 남한강으로 흘러간다. 제천의 천등산 말고도 전남 고흥 천등산(550m), 전북 완주 천등산(707m) , 경북 안동 천등산(575.5 m)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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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정상에는 제천과 충주에서 각각 세운 표지석이 두 개있다) 

 

오늘 걸으려는 박달재와 배론성지는 제천 10경(1.의림지 2.박달재 3.월악산 4.청풍문화재단지 5.금수산 6.용하구곡 7.송계계곡 8.옥순봉 9.탁사정 10.배론성지) 중 두 곳이다.

 

박달재는 이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해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고 이 근처에서 애처롭게 죽어 간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설이 있다. 우리에게는 1948년에 이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을 담은 ‘울고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로 더 유명하게 각인이 된 길이다. 사실 이 길은 과거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며 이 재에서 한 밤을 묵어 가는 과거 길이기도 하니 박달도령 길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지금은 박달터널이 뚫려 박달재로 돌아가지 않고 갈 수 있어 일부러 찾아야 하는 잊혀진 옛길이지만 제천시가 걷고 싶은 길로 다시 만들어 놓았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박달도령은 장원급제하지 못하고 낙방해 슬픔에 잠겨 약속보다 늦게 돌아와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는 박달을 애타게 기다리다 3일전에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 슬퍼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다 박달이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다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갔지만 잡지 못했다. 박달은 어렵게 고개에 도착해 금봉이를 안았지만 안타깝게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자 박달은 천길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날려 금봉이를 따라 갔다는 애처로운 전설이 스며있는 못다 이룬 사랑의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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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달재의 전설, 박달도령과 금봉낭자 

 

박달재는 또 1217년(고려 고종4) 거란 10만 대군이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전승한 곳이기도 하다. 그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사비를 들여 안국사라는 작은 절을 세워 김취려장군 대첩비와 기마상, 그리고 역사관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박달재에는 박달과 금봉의 조각공원, 목각공원 등 볼거리가 있으며 고사한 수령 1000년의 느티나무에 나무아미타불과 오백나한 상을 새긴 목굴암도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다.  

 

박달재5.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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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와 관한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 속담에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값싸게 산 물건은 품질이 좋지 않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들이 박달재에 묵어 떠난 던 다음 날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먼 길을 가는 선비에게 주모가 정성으로 무엇을 싸주었는데 선비가 주모에게 “이것이 무엇이요?” 라고 묻자 주모는 “싼 것이(게) 비지떡이요”라고 답해서 그런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콩비지로 만든 떡이 비지떡인데 비지는 찌꺼기로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기에 보잘 것 없고, 볼품 없다는 뜻의 값이 싼 물건은 싼 가격만큼 품질도 떨어진다는 의미와 대동소이하다. 

 

박달재의 전설과 이야기를 뒤로하고 주론산의 천주교 배론 성지로 향한다. 박달재에서 배론 성지까지는 약 5.5km정도로 천천히 걸어도 3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달한다. 박달도령의 과거 보러가는 옛길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순례자의 길’로도 불린다.  

 

박달재 초입 성황당(서낭당) 돌탑을 지나면 바로 약간 힘든 경사로를 올라야 하는데 숨이 턱에 찰만큼 힘들 때쯤이면 평지길로 바뀌고 완만한 내리막과 오르막 길을 2.2km정도 걸으면 파랑재(팔왕재)에 이른다. 파랑재는 주론산 정상, 박달재 자연휴양림과 배론 성지로 향하는 갈림길로 여기서부터는 고생하지 않고 걸어도 되는 완만한 내리막 임도길로 이어진다. 이 임도는 걷는 사람들도 많지만 자전거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박달재 MTB(산악자전거) 길이기도 하다.  

 

배론성지의 배론은 산골짝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주론산이라 불리는 주론도 주(, 배주)론도 비숫한 의미이다. 천주교 성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배론을 외국어로 알고 있지만 순수한 우리말 ‘배 밑바닥’이 그 유래이다.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신해박해 이후 천주교 신자들이 탄압을 피해 은신처로 숨어들은 박달재길은 은신자들이 화전과 더불어 옹기를 구워 충주에 팔기 위해 가던 파랑재와 박달재가 있는 아픈 길이다. 파랑재를 지나 평범한 임도길을 따라 약 2Km 정도를 걸어 내려가면 배론성지에 다다른다.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성지(舟論聖地)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천주 교회사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인데 조선 정조 신유사옥때 천주교신자들이 피신하던 곳이었다. 배론성지에는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신부의 묘가 있으며 황사영신부의 토굴과 백서가 보전되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어 신도들을 육성했다. 한양에서 오다 보면 주론산 아래 첩첩산골에 조성되어 있어 당시에는 찾기가 쉽지 않은 터였을 것이다.

 

 박달재7.jpg 

(성지 뒤로 주론산이 보인다)

 

배론 성지에는 역사적 장소와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지만 꼭 보아야 할 곳 황사영신부 토굴과 백서이다. 황신부는 경남 창녕(昌寧) 사람으로 정약현(丁若鉉 : 정약용의 맏형, 이복형제)의 사위이다. 중국 천주교회 사제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알렉시오(Alexis)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1798~1799년경에는 한양에 머물면서 나이 많은 여러 교우들에게 천주교회 교리를 가르쳐 주고 교리서를 등사하였다. 주문모신부가 들어오자 그를 도와 전교에 힘썼는데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배론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인들의 마을에 가서 토굴 속에 숨었다. 황심(黃心)이라는 열렬한 천주교 신자와 황사영이 연락이 닿아 위기에 놓인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나라를 통째로 청나라 교구에 바칠 사특한 궁리를 하였다. 그들은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받은 실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천주교회의 재건책을 호소하며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라는 편지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로 하여금 떠나는 동지사 일행에 끼어서 중국 천주교회 북경교구의 주교에 전달하려고 하였으나 도중에 적발되었다.

 

황사영은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 올라와 처형되었으며 가산을 몰수당하고 어머니는 거제도, 처는 제주도, 아들은 추자도에 각각 귀양 갔다. 먼저 잡힌 황심과 옥천희도 처형되었다. 백서는 관헌의 손에 넘어가 천주교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조정에서는 백서의 원 기록에서 불리한 중국인 천주교 사제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에 관한 기사는 빼고 수정해 겨우 1행에 65자 15행, 도합 860여 자로 만들었는데 이 편지는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편에 북경 청나라 황제에게 보고되어 황제의 양해를 구했다. 오늘날에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의 2종이 있으며 이것은 신유박해 후 근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던 뮈텔 주교의 손으로 넘어갔다.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에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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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신부의 토굴) 

 

박달재 옛길(과거길, 순례자의 길)은 아래 길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탄압의 길이었고 위로는 지방 선비들이 관직으로 나가기 위한 희망의 길이었으리라. 그 길에는 장원급제로 어사화로 장식된 희망의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고, 박달낭자와 금봉이의 가슴 아픈 사랑의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고, 주모가 싸주던 비지떡의 따뜻한 마음의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고, 천주교를 박해하던 고난의 길이기도 하였다. 오늘 걸은 길은 목불암을 출발해 성황당을 지나 천주교 배론 성지까지 이어진 길로 어쩌면 불교, 토속신앙, 천주교가 어우러진 화합의 길처럼 아프고 쓰라린, 즐거움이 다 스며든 역사의 뒤안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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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출처: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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