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문화에 깊이 뿌리내려온 민간신앙을 비롯하여 외래종교인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등 수없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한국문화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이자, 곧 한국인의 삶의 원형이다. 특히 넓은 뿌리와 역사를 가진 민간신앙은 무속, 마을제사, 가정신앙, 점복, 주술 등으로 폭넓게 전승되었으며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걸친 불교문화, 조선 5백년의 유교, 근대 이후의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 안에도 민간신앙의 요소들이 잠복돼 있다.
또 민간신앙은 외래종교의 조직이나 교리등과 융합하여 동학이나 증산교와 같은 자생종교로 성장해 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민간신앙 자체는 무속을 비롯한 판소리, 마을제사와 농악들 처럼 민속예술과 전통문화 보존의 뿌리를 이루어 왔다.
무당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노래와 춤으로 인간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비는 의식이다. 무당은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인간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 전달해주는 중간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서낭당은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나 고갯마루에 수북히 쌓인 돌무더기로 그 옆에는 보통 신성시되는 나무나 장승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그 옆을 지나 다니면서 돌이나 나무 또는 오색의 천 등을 올려놓으면서 개인의 소원이나 마을의 평안을 빌었다.
장승은 마을의 입구나 길가에 세운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든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을 위협하는 잡귀를 물리치고 재난으로부터 보호하며 때로는 개인적으로 소원을 기원하는 대상으로써의 역할을 한다. 또한 사찰의 입구나 지역간의 경계선에 서서 경계표와 이정표 등의 역할도 한다.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을 본 떠 만든 모형이나 그를 닮은 형태를 숭배하는 민간신앙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기신앙의 역사는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바위에 새긴 성기를 노출한 남자 그림이나 신라시대의 토우(土偶)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후에도 돌이나 나무, 도토기(陶土器) 등으로 성기 모형을 만들거나 성기와 유사한 암석이나 지형 등의 자연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농사나 사냥, 고기잡이의 풍요가 절실하게 필요했으며, 또한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마음은 성생활의 내면적 의의를 깨닫는데 도달하게 되어 성신앙을 사회적.문화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를 상징하는 성기를 숭배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불교적인 성격을 띤 국가행사로 그 시작은 신라 진흥왕 때(551년) 열리게 되었고 특히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께 등(燈)과 향(香)을 올리는 것을 중요시하는데, 특히 등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밝고 맑고 바르게 하여 이로써 부처님께 귀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월 초파일에 절에서 승려가 염주를 들고 부처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탑을 돌면 신도들이 등에 붉을 밝혀 들고 그 뒤를 따라 돌면서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는 불교의식으로 시작되었으나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민속놀이의 하나로 변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불교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부처에 대한 칭송을 하다가 차츰 민요풍의 노래도 부르게 되고 개인의 소원을 빌게도 되었다. 또한 참여 인원도 늘어나서 큰 절에서는 수백 명이 참가하는 탑돌이의 장관을 볼 수 있다.
탑을 도는 순서와 방향에 따라 10가지로 구분되는데 비록 민속놀이지만 불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매우 경건한 형태를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에는 쇠퇴되었다가 1970년 속리산 법주사에서 재연되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의식의 순서는 물론 참여하는 인원, 음식의 종류와 놓는 방법, 연주하는 음악과 춤 등에 대하여 그 절차와 격식이 엄격하고 까다롭게 정해져 있으며 의식은 매우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1986년 11월 1일에 성균관의 석전대제보존회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85호로 지정되었으며 오늘날도 해마다 봄, 가을에 석전을 올린다.
한국에 카톨릭이 전래되면서 처음에는 종교이기보다는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여졌다. 차츰 많은 사람들이 서학(西學)에 심취하게 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주문모(周文謨)와 같은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해 교세가 확장되었다.
1784년에는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본격적인 교회가 창설되었다. 많은 박해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더욱 확장되어 정약용의 형제인 정약전.정약종과 같은 학자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신도를 얻게 된다.
이렇게 해서 발전한 천주교는 근대사회에 들어와 여러 가지 사회사업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하였고, 오늘날은 거의 200만에 가까운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한 전도사업에 힘쓰고 있다.
한국에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것은 미국의 북장로교로, 1884년 의료선교사 알렌(Allen, H.N.)의 서울 도착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광혜원(廣惠院)을 열고 의료사업을 통해 선교의 문을 열었으며, 곧이어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Appenzeller,H.G.), 스크랜턴(Scranton,W.B.) 등이 도착하면서 이화학당 . 배재학당 등을 세워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천도교는 동학(東學)을 바탕으로 발전된 민족종교로 처음에는 기존의 정치체제를 개혁하고자 시작한 단체였으나 일부 세력이 친일화하자 정치적 관심을 포기하고 1905년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면서 새로운 교리와 체제를 확립하고 본격적인 종교로서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국민들에게 사회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결과 3.1만세운동 때에 중심역할을 담당하였고, 잡지를 발간하는 등 근대적인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계몽에 힘썼다.
한국 자생종교의 하나로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출신의 박중빈(朴重彬, 호는 소태산(少太山))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불교는 그 연원을 불교에 두고는 있으나 근본진리가 사상적으로 같을 뿐이고, 창교자인 소태산은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내세워 불교를 혁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