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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사람

한국 & 사람

(출처:금산군)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는데 약 1500년 전 강처사의 전설에의하면 금산의 진악산 관음굴에서 어머니의 쾌유를 빌고 있던 강씨성을 가진 선비에게 꿈에서 "암벽에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드려라"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을 찾아나서 그 풀을 약으로 달여드리니 어머님 병이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개안리(현재 남이면 성곡리) 마을에 심어 재배하게 된 것이 금산인삼이라는 것이다. 제나라의 학자 도홍경의 저서 ‘신농본초경’에 금산인삼의 우수성을 적은 기록이 발견돼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다. 충청남도 금산은 예부터 개성지방과 함께 한국의 2대 인삼산지로 알려져 왔다. 금산의 인삼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은 6•25 전쟁 이후로, 1960∼70년대 초까지도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 이상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인삼은 연작이 어렵지만 재배기술의 확대로 그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현재 금산의 인삼 생산량은 전국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인삼 조합들도 대부분 금산에서 가격을 결정받고 있어 여전히 금산은 전국 최대의 인삼 집산지 시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0년대부터 운영되었다는 충남 금산의 전통시장은 약령시장으로 대표된다. 금산 약령시장은 우리나라 3대 약초시장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그 바탕은 인삼이었다. 금산의 중도리 일대에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서는 5일장과 함께 상설시장•수삼센터•백삼시장인 국제시장•약초전문시장 등이 함께 들어서 있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과 농민들, 수삼•백삼•홍삼 등 각지의 인삼들로 북적댄다. 특히 장날 새벽 3∼4시경부터 오후 3∼4시까지가 가장 성황을 이룬다. 현재 값싼 외국산 수입인삼에 맞서 질 좋은 우리의 인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1981년 이후부터는 매년 9월이나 10월에 금산인삼제가 열리기도 한다. (사진:덕담 박승우)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서기 5세기경 중국 양(梁)나라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본초몽전(本草蒙筌)에서이며 한편 명의별록(名醫別錄)과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동양최고의 의서인 신농본초경(A.D.456~536)이고 이시진의 본초강목(A.D.1596)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출처:금산군)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는데 약 1500년 전 강처사의 전설에의하면 금산의 진악산 관음굴에서 어머니의 쾌유를 빌고 있던 강씨성을 가진 선비에게 꿈에서 "암벽에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이 있으니 그 뿌리를 달여드려라"라는 산신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 빨간 열매가 3개 달린 풀을 찾아나서 그 풀을 약으로 달여드리니 어머님 병이 완쾌되었고 그 씨앗을 개안리(현재 남이면 성곡리) 마을에 심어 재배하게 된 것이 금산인삼이라는 것이다.   제나라의 학자 도홍경의 저서 ‘신농본초경’에 금산인삼의 우수성을 적은 기록이 발견돼 금산인삼의 오랜 역사와 탁월한 약효는 문헌적으로 입증되었다.   충청남도 금산은 예부터 개성지방과 함께 한국의 2대 인삼산지로 알려져 왔다. 금산의 인삼이 오늘날처럼 성장한 것은 6•25 전쟁 이후로, 1960∼70년대 초까지도 전국 인삼 생산량의 80% 이상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인삼은 연작이 어렵지만 재배기술의 확대로 그 생산지가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어 현재 금산의 인삼 생산량은 전국의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인삼 조합들도 대부분 금산에서 가격을 결정받고 있어 여전히 금산은 전국 최대의 인삼 집산지 시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40년대부터 운영되었다는 충남 금산의 전통시장은 약령시장으로 대표된다. 금산 약령시장은 우리나라 3대 약초시장으로 자리매김해 왔고 그 바탕은 인삼이었다.   금산의 중도리 일대에는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 서는 5일장과 함께 상설시장•수삼센터•백삼시장인 국제시장•약초전문시장 등이 함께 들어서 있어 전국에서 모여든 상인들과 농민들, 수삼•백삼•홍삼 등 각지의 인삼들로 북적댄다.   특히 장날 새벽 3∼4시경부터 오후 3∼4시까지가 가장 성황을 이룬다. 현재 값싼 외국산 수입인삼에 맞서 질 좋은 우리의 인삼을 지키려는 주민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으며, 1981년 이후부터는 매년 9월이나 10월에 금산인삼제가 열리기도 한다.   (사진:덕담 박승우)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서기 5세기경 중국 양(梁)나라 시대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과 본초몽전(本草蒙筌)에서이며 한편 명의별록(名醫別錄)과 중국 명(明)나라 시대의 이시진(李時珍)이 쓴 본초강목(本草綱目)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인삼이 약초로서 효능이 기록된 것은 동양최고의 의서인 신농본초경(A.D.456~536)이고 이시진의 본초강목(A.D.1596)에 고려삼, 백제삼 등의 구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인삼이 재배된 것을 알 수 있다.  

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동진(朴東鎭, 아호(雅號)는 인당(忍堂), 1916년 7월 12일~2003년 7월 8일)옹은 중학 졸업반인열 여섯살때 판소리에 넋을 잃은 후로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집을나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유명하다는 소리선생은 모두 찾아다니며 소리를 익혀나갔다. 그때 만난 스승들이 당대 명창들이던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 정정열씨 등이다. 하지만 소리꾼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기생 소리 선생 노릇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러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며 비로소 소리에만 집중할 수있게 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 늦여름 '흥보가'를 5시간 동안완창한 이후이다. 이를 기점으로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 0’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등 완창 발표회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 등 새로운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렇듯 그가 완창하지 않은 판소리가 거의 없을정도이다. 여든의 말년에 나이에도 믿기지 않는 정력으로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반에 이르는 판소리 완창을 해냈다. 1973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비대중적이라는 '적벽가'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단장에 취임하고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가졌다.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뒤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잇단 종교적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새 장을 열기도했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1987년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90년대후반 공주에 낙향해 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노구에도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81년은관문화훈장, 1982년 전국국악대상, 1983년에는 서울시문화상, 작고 후 2003년 7월 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시진: 덕담 박승우) 무형문화재 박동진 판소리 명창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동진(朴東鎭, 아호(雅號)는 인당(忍堂), 1916년 7월 12일~2003년 7월 8일)옹은 중학 졸업반인 열 여섯살때 판소리에 넋을 잃은 후로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을 했다. 소리를 배우기 위해 무작정 집을 나선 그는 전국을 다니며 유명하다는 소리선생은 모두 찾아다니며 소리를 익혀나갔다.    그때 만난 스승들이 당대 명창들이던 유성준, 조학진, 김창진, 정정열 씨 등이다. 하지만 소리꾼의 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기생 소리 선생 노릇을 하기도 해야 했다. 그러다 1962년 국립국악원에 들어오며 비로소 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68년 늦여름 '흥보가'를 5시간 동안 완창한 이후이다.   이를 기점으로 1969년 ‘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 0’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또한 1970년에는 ‘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등 완창 발표회를 가졌고 ‘성웅 이순신’ 등 새로운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렇듯 그가 완창하지 않은 판소리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여든의 말년에 나이에도 믿기지 않는 정력으로 짧게는 3시간, 길게는 8시간 반에 이르는 판소리 완창을 해냈다. 1973년 판소리 다섯 마당 중 가장 비대중적이라는 '적벽가'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고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뒤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잇단 종교적 창작 판소리를 발표해 새 장을 열기도 했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을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 공주에 낙향해 소리 전수관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쓰는 한편 노구에도 공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다.   1981년 은관문화훈장, 1982년 전국국악대상, 1983년에는 서울시 문화상, 작고 후 2003년 7월 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시진: 덕담 박승우)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은 한 종류의집단에서부터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 개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한 사회집단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의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고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역사에 따라 각기 조금씩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어 있는 통과의례는 조선시대의잔영이 많다. 조선은 주자의 가례를 충실히 따른 유교의 이념적사회였으며 효를 그 근본으로 하였다. 따라서 출산과 관례, 혼례외에도 상례와 제례를 중시하는데 모든 통과의례가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현재우리나라의 통과의례 중에도 관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일반에서도 가정의례로 행해지고 있으며, 관례는의식으로서 공공의 기관이나 장소에서 행사로 치르는 경향이 있다.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써 통과의례의첫 번째 과정이다. 기자의례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전통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은 각종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자(祈子, 아이를 갖도록 비는 행위)를 하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들은 산천이나 명승지 혹은 절을찾아 다니며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다. 그 치성의 대상물은 대부분 돌과 바위인데 그 중에는남자의 성기를 도작한 것이 많았다. 또 금줄을 훔치거나 금줄에 달렸던 고추를 몰래 훔쳐다 다려 먹거나삼신상에 올려 놓았던 쌀을 훔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기자행위는 정해진 절차나 의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무한히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기자신앙에 담긴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정성과 생명체에 대하여지녔던 존엄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중요한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산의례 (삼신당) 삼신할멈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기 낳는 일을 맡고있다는 신을 삼신할멈이라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파란 멍이 있는 것도 삼신할멈이 얼른 세상에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내서 그렇다고 믿었다. 해산 때에는 우선 아기를 낳기 전에 짚을 깔고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빌며 삼신할멈을 위한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고마움의 표시로흰 쌀밥과 미역국을 먼저 올리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21일(삼칠일)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습속은 인간능력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불행을 절대적 존재에 귀의해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하늘 숭배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샤머니즘의 유습이다. 금줄 금줄은 마을사람과 외부 사람에게 성스러운 산고에접근해서 아이와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대문 기둥 윗부분에 쳐 두었던 신호의 줄이다. 같은 식구가 아닌 경우 금줄 쳐진 집안에는 발을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 숯, 짚 등을 달고 딸의 경우에는 숯, 미역, 솔잎, 종이 등을 달아두어 아기의 성별을 알렸는데 금줄은 보통 21일 동안 쳐 두었다. 이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들락거리면 삼신할멈이노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었으나 면역능력이 없는 아기의 보호기능을 하는 매우 과학적인 풍습이다. 돌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 동안 아무 탈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여 잔치를크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풍습이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백설기는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붉은 빛의 수수경단은 액운을 면하라고, 배가 볼록하게 빚은 송편은 식복이 있으라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은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국수와 타래실은 수명장수를 비는 뜻으로 준비했다. 또 돌잡히기(돌잡기)를 하는데 돌상 위에 돈과 활, 화살과 붓, 벼루 먹을 놓고 아이가 첫 번째 잡는 것으로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기뻐하는 풍습이다. 이때 돈은 부귀를, 붓은 학문을,활은 용맹을 상징하며 여아일 경우에는 색지, 자, 실을놓는데 이는 바느질 솜씨를 여성 기예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 덕담 박승우)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은 한 종류의 집단에서부터 다른 집단으로 옮겨가 지위가 바뀌거나 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풀이될 때 인간이 치르는 일정한 집단적 의례를 통과의례라 한다.     개인은 가족, 친족,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그 개인의 사건은 사회집단 전체의 것으로 인식되었기에 한 사회집단의 성원은 그 사회가 규정한 일정한 시기에 모두 동일한 형태의 의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통과의례는 모든 사회에 존재하지만 사회구조나 문화의 차에 따라 강조하는 의례가 다르고 절차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도 역사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규범과 절차가 진행되었는데, 현재까지 우리 생활에 반영되어 있는 통과의례는 조선시대의 잔영이 많다.    조선은 주자의 가례를 충실히 따른 유교의 이념적 사회였으며 효를 그 근본으로 하였다. 따라서 출산과 관례, 혼례 외에도 상례와 제례를 중시하는데 모든 통과의례가 자손이 대대로 번성하고 조상을 받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통과의례 중에도 관례를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일반에서도 가정의례로 행해지고 있으며, 관례는 의식으로서 공공의 기관이나 장소에서 행사로 치르는 경향이 있다.    출산의례는 한 개인의 생이 시작되는 의례로써 통과의례의 첫 번째 과정이다.      기자의례   아들이 대를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전통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한 여인들은 각종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자(祈子, 아이를 갖도록 비는 행위)를 하였다.    자식이 없는 여자들은 산천이나 명승지 혹은 절을 찾아 다니며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렸다. 그 치성의 대상물은 대부분 돌과 바위인데 그 중에는 남자의 성기를 도작한 것이 많았다. 또 금줄을 훔치거나 금줄에 달렸던 고추를 몰래 훔쳐다 다려 먹거나 삼신상에 올려 놓았던 쌀을 훔쳐다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기자행위는 정해진 절차나 의례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무한히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기자신앙에 담긴 여인들의 자식에 대한 간절한 정성과 생명체에 대하여 지녔던 존엄성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중요한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산의례    (삼신당)   삼신할멈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기 낳는 일을 맡고 있다는 신을 삼신할멈이라 불렀다. 갓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에 파란 멍이 있는 것도 삼신할멈이 얼른 세상에 나가라고 엉덩이를 밀어내서 그렇다고 믿었다.     해산 때에는 우선 아기를 낳기 전에 짚을 깔고 아기의 안전한 탄생을 빌며 삼신할멈을 위한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고마움의 표시로 흰 쌀밥과 미역국을 먼저 올리는 습속이 있는데 이는 21일(삼칠일) 동안 계속된다.    이러한 습속은 인간능력으로는 어렵다고 생각되는 불행을 절대적 존재에 귀의해서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자기 암시의 효과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하늘 숭배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샤머니즘의 유습이다.     금줄  금줄은 마을사람과 외부 사람에게 성스러운 산고에 접근해서 아이와 산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대문 기둥 윗부분에 쳐 두었던 신호의 줄이다.     같은 식구가 아닌 경우 금줄 쳐진 집안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새끼줄에 고추, 숯, 짚 등을 달고 딸의 경우에는 숯, 미역, 솔잎, 종이 등을 달아두어 아기의 성별을 알렸는데 금줄은 보통 21일 동안 쳐 두었다. 이는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들락거리면 삼신할멈이 노해서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기 때문이었으나 면역능력이 없는 아기의 보호기능을 하는 매우 과학적인 풍습이다.      돌  아기가 태어난 지 만 1년이 되는 생일에 행하는 의례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못하였던 옛날에는 아기들의 사망률도 높았으므로 1년 동안 아무 탈없이 성장하여 첫돌을 맞는 일은 특별히 중요하여 잔치를 크게 베풀었는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풍습이다.    돌에는 백설기와 수수경단, 송편과 국수 그리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로 돌상을 차려주는데 의미가 담긴 상차림이다. 백설기는 깨끗하고 순수한 정신을, 붉은 빛의 수수경단은 액운을 면하라고, 배가 볼록하게 빚은 송편은 식복이 있으라고, 대추와 각양각색의 과일은 열매를 맺듯이 자손이 번영하라는 축복의 뜻으로 국수와 타래실은 수명장수를 비는 뜻으로 준비했다.    또 돌잡히기(돌잡기)를 하는데 돌상 위에 돈과 활, 화살과 붓, 벼루 먹을 놓고 아이가 첫 번째 잡는 것으로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기뻐하는 풍습이다. 이때 돈은 부귀를, 붓은 학문을, 활은 용맹을 상징하며 여아일 경우에는 색지, 자, 실을 놓는데 이는 바느질 솜씨를 여성 기예의 으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진: 덕담 박승우) 

(사진: 덕담 박승우) 김금화(1931년 8월 18일 ~ 2019년 2월 23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금화(金錦花)는 만신으로 45년을살아온 무당이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당시 황해도 지방을 휘젓고 다니던큰 무당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그녀는 시집 구박을 견디지 못해 16세 되던 봄에 뛰쳐나온 후 외가로 들어가, 17세 되던 해 외할머니를통해 내림굿을 받고 무당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당시에 외할머니와 함께 큰 무당으로 활동하던 세 무당할머니들로부터 무당의 길을 배웠다. 이후 무속이 미신으로 천대받는 사회적 분위기를견디어낸 그녀는 1966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입상, 1981년국풍81 등으로 유명해졌다. 1982년에는 미국에서 열린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신들린 작두타기로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1985년해서풍어제 기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 82-나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그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가 영화 '만신'(박찬경 감독)으로제작되기도 했다. 2007년'비단꽃 넘세' 자서전 발간,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 '김금화 무가집' 등도 펴냈다. 2005년강화도 굿 교육당 금화당을 지었다. (사진: 덕담 박승우)   김금화(1931년 8월 18일 ~ 2019년 2월 23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난 김금화(金錦花)는 만신으로 45년을 살아온 무당이다.     그녀의 외할머니는 당시 황해도 지방을 휘젓고 다니던 큰 무당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 그녀는 시집 구박을 견디지 못해 16세 되던 봄에 뛰쳐나온 후 외가로 들어가, 17세 되던 해 외할머니를 통해 내림굿을 받고 무당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당시에 외할머니와 함께 큰 무당으로 활동하던 세 무당 할머니들로부터 무당의 길을 배웠다.    이후 무속이 미신으로 천대받는 사회적 분위기를 견디어낸 그녀는 1966년 전국민속경연대회 입상, 1981년 국풍81 등으로 유명해졌다. 1982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신들린 작두타기로 미국인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1985년 해서풍어제 기능을 인정받아 인간문화재 82-나호로 지정되었다.  2014년 그의 자서전 '비단꽃 넘세'가 영화 '만신'(박찬경 감독)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2007년 '비단꽃 넘세' 자서전 발간,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 '김금화 무가집' 등도 펴냈다.   2005년 강화도 굿 교육당 금화당을 지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예를 발휘하기 위해 생전에 기울인노력과 그들이 이룬 예술적인 성취는 전 사회가 지닌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 된다. 이러한 다양한 무형의문화유산 가운데 민족문화의 노른자위가 되는 소중한 것들을 선별·지정하여 그를 보존하기 위해 지정한 것이무형문화재이다. 정부는 1997년음악, 무용, 연극, 놀이와의식, 무예, 공예, 음식등 여러 분야에서 103종목의 중요무형문화재와 180명의보유자를 지정해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해마다 세상을 떠나고 있어 안타깝게도 전승이 끊겨그 살아 있는 기예를 다시는 볼 수 없어지게 되는 일도 많다. 여기서는 국가에 의해 지정된 인간문화재중에서,명인에서는 음악· 무용· 연극· 놀이와 의식, 무예등 공연예술 분야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예인들을, 장인에서는 입사장· 염색장등 우리의 물건을 만들어 온 공예의 달인들을 소개한다. 승무/살풀이 이매방 (사진: 덕담 박승우) 이매방(李梅芳, 1926년 5월 5일생)옹은 전남 목포의 전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이대조씨는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고법을 가르치던 명무, 명고수였다. 그는목포 권번에서 할아버지에게서 검무, 승무, 법무를 차례로학습해 갔다. 판소리도 겸하려 했으나 상성이 터지질 않아 할아버지는 그에게 "평생 춤만 춰야 한다"고 했다 한다. 그 후 7 ~8년간목포 권번에 있으면서 어린 동기들을 가르치고 광주 권번을 오가며 박여구 선생에게 승무와 북을, 이창조선생에게선 검무를 각각 익혔다. 그렇게 익힌 그의 승무는 6대째 계보를 이룬다. 목포공고 졸업 후 임방울 단체서 승무를 추기도하고 23세 때는 군산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지금까지 이어 내려져 오고 있다. 1987년 인간문화재 제27호(승무)로, 그리고 1990년에는제97호(살풀이춤)로지정되었다. 이애주 (사진: 덕담 박승우) 이애주(李愛珠, 1947년 10월 17일생)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치원 때부터 무용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그는 초등학교 입학 후 곧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 무용을 담당하고 있던 김보남에게 맡겨졌다.이때 춤동작의 기본인 승무는 물론 궁중정재와 춘앵무, 검무까지 익히게 된다. 이후 서울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리대 국문과에 학사 편입하여 다시 공부하며 전통 민속춤에 대한 이론의 바탕을 쌓게 된다. 1969년한영숙(1920~1989)을 만나 승무 예능보유자인 그녀에게 완판 승무를 익히게 되면서 이애주의 춤판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70년대 들어 그는 다시 다섯 분의 스승을 만나 춤사위를 살찌우게되며 1974년 '이애주 개인 무용 발표회' 이후 수많은 발표회와 해외 공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 승무의 악보화를위한 채보작업도 구상중인 그는 1996년 12월 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자신의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기예를 발휘하기 위해 생전에 기울인 노력과 그들이 이룬 예술적인 성취는 전 사회가 지닌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 된다. 이러한 다양한 무형의 문화유산 가운데 민족문화의 노른자위가 되는 소중한 것들을 선별·지정하여 그를 보존하기 위해 지정한 것이 무형문화재이다.    정부는 1997년 음악, 무용, 연극, 놀이와 의식, 무예, 공예, 음식 등 여러 분야에서 103종목의 중요무형문화재와 180명의 보유자를 지정해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분들이 해마다 세상을 떠나고 있어 안타깝게도 전승이 끊겨 그 살아 있는 기예를 다시는 볼 수 없어지게 되는 일도 많다.    여기서는 국가에 의해 지정된 인간문화재 중에서,명인에서는 음악· 무용· 연극· 놀이와 의식, 무예 등 공연예술 분야에서 전통을 이어가는 예인들을, 장인에서는 입사장· 염색장 등 우리의 물건을 만들어 온 공예의 달인들을 소개한다.   승무/살풀이   이매방       (사진: 덕담 박승우)   이매방(李梅芳, 1926년 5월 5일생)옹은 전남 목포의 전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이대조씨는 목포 권번에서 승무와 고법을 가르치던 명무, 명고수였다. 그는 목포 권번에서 할아버지에게서 검무, 승무, 법무를 차례로 학습해 갔다. 판소리도 겸하려 했으나 상성이 터지질 않아 할아버지는 그에게 "평생 춤만 춰야 한다"고 했다 한다.     그 후 7 ~8년간 목포 권번에 있으면서 어린 동기들을 가르치고 광주 권번을 오가며 박여구 선생에게 승무와 북을, 이창조 선생에게선 검무를 각각 익혔다.    그렇게 익힌 그의 승무는 6대째 계보를 이룬다. 목포공고 졸업 후 임방울 단체서 승무를 추기도 하고 23세 때는 군산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여 지금까지 이어 내려져 오고 있다. 1987년 인간문화재 제27호(승무)로, 그리고 1990년에는 제97호(살풀이춤)로 지정되었다.   이애주   (사진: 덕담 박승우)   이애주(李愛珠, 1947년 10월 17일생)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치원 때부터 무용에 소질이 있었다고 하는 그는 초등학교 입학 후 곧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 무용을 담당하고 있던 김보남에게 맡겨졌다.이때 춤동작의 기본인 승무는 물론 궁중정재와 춘앵무, 검무까지 익히게 된다. 이후 서울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문리대 국문과에 학사 편입하여 다시 공부하며 전통 민속춤에 대한 이론의 바탕을 쌓게 된다.    1969년 한영숙(1920~1989)을 만나 승무 예능보유자인 그녀에게 완판 승무를 익히게 되면서 이애주의 춤판 인생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970년대 들어 그는 다시 다섯 분의 스승을 만나 춤사위를 살찌우게 되며 1974년 '이애주 개인 무용 발표회' 이후 수많은 발표회와 해외 공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 승무의 악보화를 위한 채보작업도 구상중인 그는 1996년 12월 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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