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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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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보물 제182호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원래 모습을 찾는다.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그리고 안동시는 앞으로 7년간(2019년∼2025년) 280억 원을 투입해 안동 임청각을 복원·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을 최근 마무리했다. 안동 임청각 복원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안동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년∼1932년) 선생의 가옥으로, 항일독립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 마련 등을 위해 집을 내놓기도 하는 등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서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앙선 철로 개설(1941년)로 훼손되었던 임청각과 그 주변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정비한다는 원칙으로, 1763년 문집 <허주유고> 속 그림인 ‘동호해람’과 1940년을 전후로 촬영된 사진과 지적도 등 고증이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종합적인 복원·정비 계획을 마련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조상인 고성 이씨 허주 이종악(1726~1773)이 발간한 문집 <허주유고>속에 임청각과 그 주변 전경을 묘사한 그림. (사진=문화재청) 이번 사업은 지난해 11월 2일 임청각 종손과 문중대표, 지역 전문가 등의 추진위원회와 문화재위원회의(건축문화재분과, 8월 16일)의 검토를 거쳐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임청각 주변에 멸실된 분가(출가한 자식들의 가옥) 3동을 복원하고 주변지형과 수목, 나루터 등을 최대한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한편, 진입부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한다. 다만 복원·정비사업을 위해 임청각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로의 이전과 철거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철로의 철거 이전은 2020년까지로 예정되어있다. 때문에 철거 이후인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훼손 건물, 지형과 경관 등을 복원하고 편의시설 설치 등을 차례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광복절 기념식과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 등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임청각의 옛 모습 회복사업의필요성을 누차 강조한 만큼, 이번 복원으로 임청각이 국민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곳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의 :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042-481-4916) [자료제공 :(www.korea.kr)] 우리나라 보물 제182호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이 일제강점기 이전의 원래 모습을 찾는다.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그리고 안동시는 앞으로 7년간(2019년∼2025년) 280억 원을 투입해 안동 임청각을 복원·정비하기 위한 종합계획을 최근 마무리했다.     안동 임청각 복원 조감도. (사진=문화재청) 안동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년∼1932년) 선생의 가옥으로, 항일독립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자금 마련 등을 위해 집을 내놓기도 하는 등 애환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서 9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역사적인 장소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앙선 철로 개설(1941년)로 훼손되었던 임청각과 그 주변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정비한다는 원칙으로, 1763년 문집 <허주유고> 속 그림인 ‘동호해람’과 1940년을 전후로 촬영된 사진과 지적도 등 고증이 가능한 자료를 근거로 종합적인 복원·정비 계획을 마련했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조상인 고성 이씨 허주 이종악(1726~1773)이 발간한 문집 <허주유고>속에 임청각과 그 주변 전경을 묘사한 그림. (사진=문화재청) 이번 사업은 지난해 11월 2일 임청각 종손과 문중대표, 지역 전문가 등의 추진위원회와 문화재위원회의(건축문화재분과, 8월 16일)의 검토를 거쳐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임청각 주변에 멸실된 분가(출가한 자식들의 가옥) 3동을 복원하고 주변지형과 수목, 나루터 등을 최대한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 한편, 진입부에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한다.   다만 복원·정비사업을 위해 임청각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철로의 이전과 철거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데 철로의 철거 이전은 2020년까지로 예정되어있다. 때문에 철거 이후인 2021년부터 2025년까지 훼손 건물, 지형과 경관 등을 복원하고 편의시설 설치 등을 차례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광복절 기념식과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 출범식 등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임청각의 옛 모습 회복사업의 필요성을 누차 강조한 만큼, 이번 복원으로 임청각이 국민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곳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의 :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042-481-4916)           [자료제공 :(www.korea.kr)]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강화 화문석장 60만 번의 손길이 필요한 명품중의 명품- 화문석 [花紋席] 꽃의 모양을 놓아 짠 돗자리.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의 특산품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했으며 장흥고(長興庫)에서 수요를 담당했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등의 문헌에 의하면 옛날의 고급스런 화문석은 용수초(龍鬚草)로 만들었으며 문양에 따라 황화석(黃花席) · 잡채화석(雜彩花席) · 오조룡석(五爪龍席) · 국화석(菊花席) · 오채룡문석(五彩龍紋席) 등으로 불렸다. 강화화문석장-전경 강화화문석장-개장 전. 시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푼이라도... 강화화문석장 강화화문석-문양 이 정도면 좋은 가격인데...강화화문석장 제작방법은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莞草) 화문석을 직조하는 노경소직법(露經疎織法)과 등메를 제작하는 은경밀직법(隱經密織法)으로 크게 나뉜다. 먼저 사초과에 딸린 1년생 풀인 왕골(완초)을 거두어들여 찬이슬을 맞혀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리는데,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이다. 다음에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화문석 제작시에는 염색한 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나간다. 세 사람이 너비 6, 7자의 화문석 1장을 짜는 데는 5일쯤 걸린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문양으로는 용(龍) 문양, 호(虎) 문양, 원앙과 봉황 문양, 학(鶴) 문양, 매화 문양, 모란 문양, 문자 문양 등이 있고 근래에는 주로 거북 · 사슴 · 학 등 장생동물과 수복강녕(壽福康寧) · 만수무강(萬壽無疆) · 구름 · 소나무 등이 도안된다.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강화 화문석장   60만 번의 손길이 필요한 명품중의 명품- 화문석 [花紋席] 꽃의 모양을 놓아 짠 돗자리.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의 특산품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했으며 장흥고(長興庫)에서 수요를 담당했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 등의 문헌에 의하면 옛날의 고급스런 화문석은 용수초(龍鬚草)로 만들었으며 문양에 따라 황화석(黃花席) · 잡채화석(雜彩花席) · 오조룡석(五爪龍席) · 국화석(菊花席) · 오채룡문석(五彩龍紋席) 등으로 불렸다.   강화화문석장-전경   강화화문석장-개장 전. 시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한푼이라도... 강화화문석장   강화화문석-문양   이 정도면 좋은 가격인데...강화화문석장     제작방법은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莞草) 화문석을 직조하는 노경소직법(露經疎織法)과 등메를 제작하는 은경밀직법(隱經密織法)으로 크게 나뉜다.    먼저 사초과에 딸린 1년생 풀인 왕골(완초)을 거두어들여 찬이슬을 맞혀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리는데,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이다. 다음에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화문석 제작시에는 염색한 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나간다.   세 사람이 너비 6, 7자의 화문석 1장을 짜는 데는 5일쯤 걸린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문양으로는 용(龍) 문양, 호(虎) 문양, 원앙과 봉황 문양, 학(鶴) 문양, 매화 문양, 모란 문양, 문자 문양 등이 있고 근래에는 주로 거북 · 사슴 · 학 등 장생동물과 수복강녕(壽福康寧) · 만수무강(萬壽無疆) · 구름 · 소나무 등이 도안된다.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을 걷다 보면 서쪽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연경산(일명노적봉)이 이어지는 곳에 삼호현(三呼峴) 또는 ‘사모지 고개’ ‘사모재고개’ 등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인천 읍내에서 문학산 기슭을 넘어 지금의 송도 방면 바다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뱃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지금의 송도 능허대(凌虛臺) 주변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기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가 바로 삼호현이라 하며 그 이름도 이 같은 사연에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수도(首都)를 떠난 뒤 지금 남동구 만수동의 ‘별리현(別離峴)’을 거쳐, 다시 삼호현을 넘고한나루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을 배웅하려 따라온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헤어져야만 했는데 삼호현에 오른사신들이 여전히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보며 ‘이름을 세 번[三] 불렀다[呼]’거나‘잘 다녀오겠다고 세 번을 말했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여기서 삼(三)이란 꼭 그 숫자가아니라 ‘삼 동서가 모이면 황소도 잡는다’는 속담에서 보듯여럿 또는 여러 번을 뜻하는 말이다. 사모지 또는 사모재 고개에 대해서는 사신들이 헤어진 가족을 사모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보다는 ‘삼호’의 발음이 바뀌어 ‘사모’가 되고, 여기에 ‘지’나 ‘재’가 덧붙은 형태로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삼호)지’는 물론 ‘재’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출처: 인천광역시사)     인천의 진산인 문학산을 걷다 보면 서쪽 거의 끝 부분에 위치한 연경산(일명 노적봉)이 이어지는 곳에 삼호현(三呼峴) 또는 ‘사모지 고개’ ‘사모재 고개’ 등으로 불리는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옛날 사람들이 인천 읍내에서 문학산 기슭을 넘어 지금의 송도 방면 바다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인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보면 문학동에서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이미 백제시대부터 뱃길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지금의 송도 능허대(凌虛臺) 주변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기 위해 넘어 다니던 고개가 바로 삼호현이라 하며 그 이름도 이 같은 사연에서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은 수도(首都)를 떠난 뒤 지금 남동구 만수동의 ‘별리현(別離峴)’을 거쳐, 다시 삼호현을 넘고 한나루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을 배웅하려 따라온 가족들은 별리현에서 헤어져야만 했는데 삼호현에 오른 사신들이 여전히 별리현에 서있는 가족들을 보며 ‘이름을 세 번[三] 불렀다[呼]’거나 ‘잘 다녀오겠다고 세 번을 말했다’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다. 여기서 삼(三)이란 꼭 그 숫자가 아니라 ‘삼 동서가 모이면 황소도 잡는다’는 속담에서 보듯 여럿 또는 여러 번을 뜻하는 말이다.    사모지 또는 사모재 고개에 대해서는 사신들이 헤어진 가족을 사모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이보다는 ‘삼호’의 발음이 바뀌어 ‘사모’가 되고, 여기에 ‘지’나 ‘재’가 덧붙은 형태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때 ‘(삼호)지’는 물론 ‘재’의 발음이 바뀐 것이다. (출처: 인천광역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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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속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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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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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과 기와집, 돌담과 흙담, 아기자기한 산과 시냇물,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서낭당, 사당, 향교 등등. 정적하고 단조한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 마을의 정황이다. 자연 경관을 중요시 했던 우리 민족의 주거 형태는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이처럼 조화와 균형 속에 배치되었다.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주거 문화는 선사시대의 움막과 원두막과 같은 생나무 집에서 출발하여 수혈 주거, 귀틀집, 초가, 기와집의 형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기원 전 4세기 경 농업 생활의 정착과 함께 우리의 고유한 난방장치인 온돌이 발명되면서 부터 초가집과 기와집이 일반화 되었으며, 기후와 생활 양식에 따라 홑집과 겹집,양통집, 곱은자 집 등의 다양한 형태가 생겨났다. 이처럼 집의 형태나 크기가 달라지면서 주거 생활의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곡물 저장과 가축 사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남녀의 활동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하기도 했다. [양반가] 보물 제414호,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양반가옥은 대체로 짙은 회색의 기와를 얹고 벽에는 흰색을 칠하며 이와 고동색의 나무색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왕궁이나 사찰에 있는 단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운데 이는 금지 이전에 꾸미지 않는다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건물들은 여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건물마다 고유의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안채, 남자와 그의 손님을 위한 사랑채, 그리고 하인을 위한 행랑채 등이 벽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직선으로 설계된 경계선 안에 질서있게 배열되어 전체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단정한 구성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대문을 다시 통해야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쪽에는 담장을 따로 쌓아 사당을 마련하였다.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낙안읍성 초가는 한국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이엉으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털털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이러한 초가가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선이 우리네 나직한 산등성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초가집의 울타리도 지붕을 닮아 각이 지거나 선이 곧은 것이 별로 없고 다만 땅이 생긴 모양대로 경계를 긋고 낮은 돌담을 울퉁불퉁 쌓거나 혹은 가는 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것이 전부이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벽으로 단순 소박하며, 방도 큰방/작은방/부엌과 헛간이 서로 붙어 'ㅡ'자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은 'ㄱ'자도 볼 수 있다. 그림은 전남 낙안의 벌교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한국 전통 초가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민속자료 33호,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김진호 집 너와집은 나무판이나 청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른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산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지역과 평안도 산간지역, 강원도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화전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적송이나 전나무 등을 가로 20-30cm, 세로 40-60cm, 두께 4-5cm 정도로 켜서 서로 포개어 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 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이 되게 눌러 놓기도 한다. 너와와 너와의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서 환기도 잘되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며, 단열효과도 커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하다. 그림은 대표적인 너와집으로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의 집으로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너와집은 산림보호책,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 사적 제267호,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서울 한강변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대부분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에 속한다. 주거의 형태는 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수혈주거로 원형에 가까운 말각(抹角) 방형의 바닥을 마련하고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둘레에는 기둥을 세워 원뿔형의 지붕을 얹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식 주거형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원두막과 같은 형태이다.내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고, 간혹 저장구덩이가 있기도 하며,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뚜렷하다. 좁은 입구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바람을 막고 햇빛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다양하나 대체로 4-5인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당시의 가족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기와 화살촉, 그물추, 뼈바늘 등이 있는데 문 가까이에서는 화살촉 등 남성용구가 주로 발견되는 반면 문에서 가장 먼 곳에는 화덕이 있으며 그 근처에서 뼈바늘, 토기 등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거지 내에서 위치에 따라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nbsp; 초가집과 기와집, 돌담과 흙담, 아기자기한 산과 시냇물, 마을 어귀의 커다란 정자나무, 서낭당, 사당, 향교 등등. 정적하고 단조한 이 풍경은 전통적인 우리 마을의 정황이다. 자연 경관을 중요시 했던 우리 민족의 주거 형태는 모든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져 이처럼 조화와 균형 속에 배치되었다.집의 형태는 기후 조건과 자연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주거 문화는 선사시대의 움막과 원두막과 같은 생나무 집에서 출발하여 수혈 주거, 귀틀집, 초가, 기와집의 형식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기원 전 4세기 경 농업 생활의 정착과 함께 우리의 고유한 난방장치인 온돌이 발명되면서 부터 초가집과 기와집이 일반화 되었으며, 기후와 생활 양식에 따라 홑집과 겹집,양통집, 곱은자 집 등의 다양한 형태가 생겨났다. 이처럼 집의 형태나 크기가 달라지면서 주거 생활의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하게 확대되기 시작했다. 곡물 저장과 가축 사육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고, 남녀의 활동 공간을 안채와 바깥채로 구분하기도 했다. &nbsp; &nbsp; [양반가] 보물 제414호,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하회리 &nbsp; &nbsp; &nbsp; 양반가옥은 대체로 짙은 회색의 기와를 얹고 벽에는 흰색을 칠하며 이와 고동색의 나무색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왕궁이나 사찰에 있는 단청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운데 이는 금지 이전에 꾸미지 않는다는 선비사상에 부합되는 것이다. &nbsp; 건물들은 여러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건물마다 고유의 기능이 정해져 있어서 여자와 아이들을 위한 안채, 남자와 그의 손님을 위한 사랑채, 그리고 하인을 위한 행랑채 등이 벽과 담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러한 건물들은 직선으로 설계된 경계선 안에 질서있게 배열되어 전체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단정한 구성을 보여준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로 직접 연결되나 안채는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작은 대문을 다시 통해야 들어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한 쪽에는 담장을 따로 쌓아 사당을 마련하였다.&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사적 제302호, 전라남도 승주군 낙안면 낙안읍성 &nbsp; &nbsp; 초가는 한국의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민들의 집으로 지붕을 이엉으로 얹기 때문에 기와집처럼 날렵하고 세련된 모습은 볼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 털털하고 소박한 맛이 있다. 이러한 초가가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초가지붕의 둥글고 울퉁불퉁한 선이 우리네 나직한 산등성이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nbsp; 초가집의 울타리도 지붕을 닮아 각이 지거나 선이 곧은 것이 별로 없고 다만 땅이 생긴 모양대로 경계를 긋고 낮은 돌담을 울퉁불퉁 쌓거나 혹은 가는 나무가지를 엮어 세운 것이 전부이다. 집은 짚을 섞어 바른 진흙벽으로 단순 소박하며, 방도 큰방/작은방/부엌과 헛간이 서로 붙어 'ㅡ'자를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나 간혹은 'ㄱ'자도 볼 수 있다. 그림은 전남 낙안의 벌교에 있는 낙안읍성으로 한국 전통 초가가 잘 남아있는 곳이다.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nbsp; 민속자료 33호,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 김진호 집 &nbsp; 너와집은 나무판이나 청석판으로 지붕을 이은 집으로 보통은 나무로 만든 것을 너와라고 부른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산림지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지역과 평안도 산간지역, 강원도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화전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산간에서 구하기 쉬운 적송이나 전나무 등을 가로 20-30cm, 세로 40-60cm, 두께 4-5cm 정도로 켜서 서로 포개어 올리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무거운 돌을 얹어 놓거나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이 되게 눌러 놓기도 한다. 너와와 너와의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서 환기도 잘되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며, 단열효과도 커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눈이 덮이게 되어 따뜻하다. 그림은 대표적인 너와집으로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의 집으로 민속자료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너와집은 산림보호책, 새마을사업에 의한 지붕개량사업 등에 의해 점점 없어져가고 있다.&nbsp; &nbsp; &nbsp; 사적 제267호,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nbsp; 서울 한강변의 동남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선사시대의 주거지로 대부분이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기에 속한다. 주거의 형태는 북방식이라 할 수 있는 수혈주거로 원형에 가까운 말각(抹角) 방형의 바닥을 마련하고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고 그 둘레에는 기둥을 세워 원뿔형의 지붕을 얹고 있다. 이에 반해 남방식 주거형태는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으로 원두막과 같은 형태이다.내부에는 돌을 돌려 만든 화덕이 하나씩 있고, 간혹 저장구덩이가 있기도 하며, 기둥을 세웠던 흔적도 뚜렷하다. 좁은 입구는 동남쪽을 향하고 있어서 바람을 막고 햇빛을 받도록 되어 있다. 주거지의 크기는 다양하나 대체로 4-5인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여서 당시의 가족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nbsp;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유물은 토기와 화살촉, 그물추, 뼈바늘 등이 있는데 문 가까이에서는 화살촉 등 남성용구가 주로 발견되는 반면 문에서 가장 먼 곳에는 화덕이 있으며 그 근처에서 뼈바늘, 토기 등 여성이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거지 내에서 위치에 따라 다른 용도의 공간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nbsp; &nbsp; &nbsp; &nbsp; &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 &nbsp; &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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